게다가 장 면 총리 자신이 수녀원 깊숙이 들어박혀 목숨을 부지하는데 급급하여 일체의 대응을 포기함으로서 거침없이 전국이 반란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로 미뤄보면 지도자 한 사람의 사생을 초월하는 결단력이 역사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5.16쿠데타가 성공한지 정확하게 5년 후 1966년 5월16일 중국의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을 선언한다. 모택동은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소련의 후원을 받으며 즉각 장개석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장개석 정권은 무능하고 부패했다. 이 때 모택동이 혜성처럼 등장하여 ‘모두 잘 살고 평등한 사회’를 내세웠으니 민심의 흐름이 어디로 가겠는가. 결국 장개석은 대만으로 도망가고 중국대륙은 공산화되었다. 1949년의 일이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였지만 그 시대 대국의 경제주체는 농업이었다. 인민들은 국유화된 농토에서 집단농사에 매달렸다. 인민공사에 속하여 사유권이 인정되지 않아도 좋았다. 모두 똑같이 나눈다는데 불평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중국인의 특성 중의 하나가 ‘상인기질’인데 이를 발휘할 기회가 없는 사회에서 그들의 불만은 팽배해져만 갔다. 모택동의 권위로서도 지탱하기가 힘들어졌다. 더구나 한국전쟁에 의용군을 파견하여 미국과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10년 세월은 중국을 궁핍으로 몰아갔다.
자본주의 ‘제국’과의 관계를 끊고 소련을 정점으로 한 공산국과의 교류만으로는 경제를 살릴 길이 없었다. 자본주의와의 타협은 항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배워온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좁은 이념을 내세워 더 조이고 압박하는 길을 택했다. 그것이 문화대혁명이다. 모택동은 인민대중노선을 표방하고 자본주의적 물질주의 타파를 부르짖었다. 10대와 20대 전반의 홍위병이 앞장섰다. ‘대약진운동’을 비판했던 모든 인사는 그들의 적이었다. 하방(下放)으로 내쫓았다. 인간개조, 정신개조를 하라는 지엄한 명령이었다. 이 과정에서 10년 동안 1000만명 정도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
‘죽의 장막’에서 벌어진 이 운동은 외부에서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이제 ‘5.16쿠데타 45주년’, ‘문화대혁명 40주년’이 된다. 한 중 양국에서 벌어진 이 혁명적 변화는 오늘날 모두 부정적 인식이 지배적이다. 이를 극복하고 민주화와 실용주의 노선에 충실한 것은 국민의 높은 지식수준과 문민주의 전통이 맥을 이어온 덕분이다.
다만 한국에서는 아직도 ‘좌파’ ‘반미친북’ 등 듣기 거북한 낱말들이 얼굴을 붉히게 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정권의 실세 주역이라고 하는 386세대들이 너그럽고 멀리 보는 식견을 넓혀야 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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