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김대중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처음 국민 앞에 나와 기자회견을 할 때 한 외신기자가 영어로 무언가 물었다. 이를 중계하던 기자가 영어를 할 줄 아는 김대중 씨라 직접 답할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김대중씨는 직접 대답을 하지 않고 통역을 찾았다. 한국말로 질문의 내용을 통역하게 하여 모든 국민이 듣게 하고 자신도 한국말로 답변함으로써 당선자로서 공인 의식을 보여 준 것인데, 그 태도는 당시 금융 위기로 의기소침해 있던 국민을 배려하고 국민의 자존심을 세워 주는 데 매우 의미 있게 보였다.
그런데 요즘, 사회의 영어 수요에 편승하여, 모든 국민이 영어를 유창하게 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구실로, 여기저기에 영어 마을을 만들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특정 지역을 영어 공용 지역으로 만들겠다고 나서는 정치인들이 등장하고 있다.
특정 대학이 영어로 강의하는 제도를 두는 것이나, 특정 지역이 영어 수요를 흡수하기 위하여 영어 마을을 만들어 운영하겠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의 경쟁력 확보 방안으로 수긍할 만한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일반 대학이나 자치 단체를 영어 공용 지역으로 만들려 하는 것은 일반 국민들의 언어 기본권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다.
한국어가 국가 발전의 바탕이다
정치인 한 사람의 말 한두 마디 때문에 우리 사회는 수십억 아니 수백억 원의 비용을 부담하게 되고, 엉뚱하게 계층이나 집단 간의 불화와 알력이라는 달갑잖은 부산물을 얻게 되기도 한다. 불필요하게 어려운 단어 때문에 지식이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데 들이는 시간과 비용이 사회적으로 그만큼 더 많이 든다. 마찬가지로 생산과 유통 등 기업 활동의 모든 부문에서 이런 시간과 비용이 누적된다면 어떻겠는가? 한국어가 국가 발전의 바탕이라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한국어가 세계인의 언어로 바뀌고 있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인이 꾸준히 늘고 있기 때문이다. 안으로 국민들의 언어 기본권을 지키고 밖으로 외국인을 위해서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이제 정치인에게 물어보자. “당신은 우리에게 한국어만으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언어 기본권을 보장하겠는가?” “당신은 우리가 세계인들에게 한국어를 보급할 수 있도록 어떤 정책을 준비할 셈인가?” 이 두 물음에 적극적으로 대답하지 못하는 정치인이라면 ‘문화 한국’을 이끌어 갈 자격이 없다고 판단해도 좋을 것이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