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검의 데이터베이스는 물론 법조인대관 등 관련 자료에서도 지연과 학연에 관련된 자료를 삭제해 줄 것을 요청하겠다고 강조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비록 작은 실험일 수도 있고, 한편 찻잔속의 태풍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변화가 결국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에 김 총장의 발표에 동의한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의식은 짚어 놓을 필요가 있다.
첫째, 학연, 지연, 혈연은 단순한 연고주의가 아니다.
벌족주의다.
우리 사회의 암적 존재다.
왜 암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가 하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와 시장주의의 기초인 인간에 대한 존중과 공정한 평가를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공정한 평가제도가 사라진 곳에 학벌, 지벌이 판친다.
전근대적인 연고주의와 신분제도가 자리한다. 21세기형 새로운 계급사회와 신분제도가 고착화되는 것이다.
그만큼 중대하고도 무서운 과제이다.
심각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둘째, 학연과 지연이 단순한 검찰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좁게는 법조 전반의 문제고, 좀 더 범위를 넓히자면 법조와 사회 간의 일종의 관계망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입해 있는 사회단체가 동창회이고, 그 다음이 향우회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전관예우도 이런 정보와 관계망을 바탕으로 형성이 된다.
그래서 의뢰인들은 이런 관계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 나서고, 법조계 주변 사람들은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합리적 사건 해결을 방해한다.
결국 혈연과 학연과 지연과 기수연이 판을 치는 전관예우가 최고의 법률실력이 된다. 비정상적인 문제 해결 방법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다.
이미 학연과 지연과 혈연은 법조를 떠나 우리 사회의 전 분야를 지배하는 거대한 사회적 운영체계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MS DOS보다 더한 운영체계다.
셋째, 검찰의 특수한 근무연과 기수연에 대해서도 매스를 가해야 한다.
특수한 조직문화는 인정한다.
일종의 상명하복적 성격도 일정 부분 용인한다.
그럼에도 근무연과 기수연이 사적 연고로 이어지고, 이를 중심으로 한 별도의 운영체계가 형성되고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인사관행이 우선되어야 하겠지만, 현재와 같은 줄세우기식 임용방식도 이번 기회에 철저하게 타파해야 한다.
혈연, 지연, 학연에다 근무연과 기수연이 결합되고, 공정한 인사평가나 성과평가, 인품평가 보다는 이런 계량화하기 쉬운 각종 연고주의가 인사의 최고 기준이 되고 만다.
검찰의 특성과 직결되는 근무연과 기수연에 대해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혁명적 변화가 필요하다.
넷째, 가장 본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결국은 권력으로부터의 일정부분 자유와 독립이 필요하다.
통치권자는 인사권을 선거를 통해 획득 혹은 위임 받았다고 생각한다.
내 맘대로 행사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승자이기에 맘껏 가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통치권자는 자신의 인사권을 바탕으로 법무부 장관을 통해 검찰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한다.
물론 법무부 장관도 검찰총장의 이런 방침을 경청했다고 했다.
경청만으론 부족한줄 잘 알 것이다.
어디까지나 법적으로 인사권자는 법무부장관이다.
검찰총장의 공정한 평가를 바탕으로 법무부장관의 인사권이 공정하게 행사되어야 한다.
법무부 장관에 대한 통치권자의 인사권이 합리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한다는 사고방식에서 국민주권으로부터 지극히 한시적으로 위임받은 권력이라는 겸손함에서 이 문제는 출발되어야 한다.
마지막이다. 그럼에도 검찰총장의 방침은 제법 신선하다.
물론 대부분 비웃을 것이다.
검찰총장이 지나치게 나이브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이 바로 김준규 검찰총장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관행과 기득권으로부터 불구속, 혹은 자유가, 혹은 변화에 대한 욕구가 김 총장의 장점이다.
이른바 검찰의 주류라인에서 빗겨나 있었다는 점, 정치검사의 오명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점, 정치권력의 혈연, 지연, 학연으로부터 도리어 가볍다는 점, 의도하지 않은 뜻밖의 과정으로 인해 어느 누구에게도 신세지거나 인사운동 없이 검찰총장에 임명될 수 있었다는 점, 이런 점들이 도리어 김 총장이 실험에 나설 수 있고 변화를 만들어 볼 수 있는, 중심에 설 수 있는 이유다.
한편 기대하고 싶지만 한편 어려움에 봉착하리라는 점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작은 날갯짓에 깃들어 있는 엄중한 문제의식에 공감한다면 결코 이번 변화와 실험은 실패로 돌아갈 수도 없고, 실패로 돌아가서도 안 된다.
우리 사회의 권력기관이라고 평가받는 검찰에서부터 이런 변화가 성공에 이를 수 있다면 김 총장의 명예는 물론 검찰의 명예요, 우리 사회의 커다란 성취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동의하고 성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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