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의 경험과 한국의 대북포용정책

김유진 / / 기사승인 : 2009-11-18 15:20:46
  • 카카오톡 보내기
  • -
  • +
  • 인쇄
김근식 경남대 정치학 교수 (김근식 경남대 정치학 교수)

11월 9일은 독일통일의 시발점이 되었던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2차 대전 이후 유사한 분단국가로 출발했지만 독일은 이미 통일 이후 20년을 맞는 반면 아직도 남북은 화해협력과 평화공존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엊그제 터져 나온 3차 서해교전은 아직도 한반도가 냉전적 대결과 군사적 충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지역임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10년 동안 화해협력이 일정하게 진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는 경색과 갈등을 지속하면서 기싸움을 벌였고 급기야 사상자까지 발생한 교전상태까지 이른 것이다.

서독이 냉전 해체 이전에 신동방정책으로 교류협력을 이미 시작하고 탈냉전을 맞이해 통일을 이루었지만, 남북한은 탈냉전 이후에도 전면적인 교류협력이 걸음마 단계이고 정권교체에 의해 남북관계마저 역진하는 우여곡절을 겪고 있다.

이같은 독일과 한반도의 차이는 남북한이 분단의 시작과 지속과정에서 전쟁의 경험과 극단적 대결 및 격렬한 체제경쟁으로 인해 동서독에 비해 훨씬 더 심각하고 끈질긴 적대관계를 내재하고 있음에서 비롯된다.

남북의 분단과 대결이 동서독에 비해 훨씬 심각하기 때문에 독일 동방정책과 맥을 같이하는 한국의 대북포용정책도 논란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대북포용정책을 개념적으로 정리해보면 ‘탈냉전 시기에 북한과의 화해와 교류협력을 확대함으로써 북한의 변화를 촉진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한국 주도의 통일을 이루려는 정책’으로 요약된다.

대북포용정책의 체계화는 김대중 정부 시기에 정립되었지만 사실 포용정책의 내용과 방향은 노태우 정부부터 시작되었다.

오히려 대북포용정책은 노태우 정부의 7.7 선언에서 그 역사적 첫걸음을 내딛은 뒤 노무현 정부까지 우여곡절과 기복을 겪으면서 포용의 전략과 방식이 조금씩 진전되어 왔다.

그동안 상황과 조건에 적응하면서 꾸준히 대북포용이 ‘진화’되어 온 것이다.

대북포용정책에 의한 점진적 통일방식이 반드시 붕괴 후 흡수통일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화해협력의 과정을 상정하지만 마지막 결과로 이뤄지는 통일이 일방의 붕괴와 타방으로의 흡수라는 경로를 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붕괴 후 흡수통일로 분류되는 독일의 경험이 화해협력에 의한 점진적 통일방식과 역사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독일통일을 붕괴에 의한 흡수통일 방식으로만 규정한다면 그것은 절반의 분석에 그친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0년 동독의 자유선거 그리고 동서독 통합 과정은 분명 붕괴 후 흡수방식에 해당된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 붕괴 이전의 20여년에 걸친 교류접촉과 화해협력의 신동방정책이 없이 하루아침에 동독이 붕괴하고 흡수통일될 수는 없었다.

동독이 서독으로 공식편입되는 1990년 10월의 ‘사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신동방정책 추진 이후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활발한 교류협력, 자유왕래 등 긴 통일과정을 겪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동독이 붕괴되고 주민들의 자유의사에 의해 서독으로의 편입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 역시 20여년 동안의 ‘접근을 통한 변화’ 즉 동방정책이라는 화해협력 정책의 성과였다.

화해협력이라는 대북포용의 ‘과정’이 지속됨으로써 비로소 붕괴 후 흡수통일이라는 ‘결과로서의 통일’을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당장의 북한 붕괴가 아니라 화해협력의 남북관계를 통해 북한이 변화하도록 꾸준히 통일과정을 준비하는 일이다.

바람직한 경로로서 점진적 평화통일을 위해서도, 그리고 도둑같이 찾아올지 모를 북한 급변사태를 지혜롭게 준비하기 위해서도 대북포용정책은 여전히 유효하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김유진 김유진

기자의 인기기사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