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주년 3.1절과 인천의 발자취

장영남 / / 기사승인 : 2012-03-01 17: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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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남(인천보훈지청 홍보주무관)
3.1절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유관순 열사’, '기미독립선언서', '33인 민족대표' 등이다. 올해는 일제의 압제 하에서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신분, 직업, 성별, 사상 및 빈부 등을 가리지 아니하고 우리 민족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목숨을 걸고 3·1독립만세를 외친지 93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해마다 국경일 및 기념일에 각종 독립행사에 참석하거나 인천지역의 생존애국지사님을 위문을 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충남 천안 아우내 장터의 유관순 열사 독립만세 운동에 비견되는 인천지역 만세운동이 있어 의미를 부여해 보고 싶다.
먼저 기미년 독립운동의 불길은 3월24일 당시 우시장이었고 지금의 인천시 계양구 장기동에 있는 황어장터에서도 타올랐다. 오후 2시쯤 장이 파하는 시각에 맞춰 600여명의 주민들은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만세"를 외쳐 불렀다. 이 과정에서 심혁성이 주도한 황어장터 만세운동에서 일본순사가 휘두른 칼에 희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격분한 주민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고, 결국 적극적으로 가담한 40여명은 일본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이 만세시위는 인천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 중 가장 대규모의 운동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계양구에서는 이 일을 기념해 황어장터가 있는 현 계양구 장기동에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을 건립하고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여 두고 있다.
이밖에 인천에서 3.1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던 곳이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건립된 인천의 공립보통학교인 창영초등학교로써 인천 만세운동의 진원지의 역할을 한 곳이다. 당시 3·1만세 시위에 고무된 3, 4학년생 김명진, 이만용, 박철준, 손창신 등을 중심으로 1919년 3월 6일 학교 전화선을 끊고 동맹휴교를 선언하고, 학교를 출발해 인천공립상업학교(지금의 인천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를 행진하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투옥되었다.
현재 창영초등학교에는 인천에서 최초로 일어난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3·1독립운동 ‘인천지역 발상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처럼 인천지역 만세운동은 14회에 걸쳐 1만 여명이 참가하는 대규모로 활발히 벌어졌다. 당시 인천에 사는 성인이면 누구나 한 번쯤 만세운동에 참가한 셈이다. 일본의 세력이 어디보다도 컸던 인천에서 줄기차게 일어난 만세운동은 자랑스러운 인천 역사의 한 단면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미래지향적이고 조용한 외교라는 방향성으로 독도영토문제, 일본군 종군위안부 강제동원 문제, 사할린 동포문제는 물론 일제 친일및 역사청산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는 항상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고 본다.
우리에게는 모든 국민이 3.1절 기념식에 참석하여 만세삼창과 3.1절 노래를 함께 제창하지 않더라도 사회 각 분야와 자리에서 독립정신으로 대표될 수 있는 나라사랑정신이 제93주년을 맞이하는 3.1절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직을 지낸 백암 박은식 선생의 글에 “정신적 국가가 망하면 형식상의 국가가 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나라는 이미 망한 나라이며, 정신적 국가만 망하지 않는다면 형식상 국가는 망하였을지라도 그 나라는 망하지 않은 나라이다”라는 말을 기억하고 실천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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