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유럽, 한 여자가 친구인 마리 크뢰이어(비르기트 요르트 소렌슨)에게 하는 말이다. 여자가 남자의 귀속품으로만 여겨지던 그 시대에는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게 지상 최대의 미션이다. 여자가 남자 이외의 대상에 집중한다거나, 자아를 찾겠다고 어쩌고 하는 건 사치다.
마리 크뢰이어는 19세기에 활동했던 덴마크 최고의 화가 P.S. 크뢰이어(쇠렌 세터 라센)의 뮤즈이자 아내이다. 남편의 그림에 모델로 자주 등장하면서 당대 최고의 미인이라는 칭호까지 얻으며 뭇 사람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됐다.
유명 화가인 남편과 사랑스러운 딸과 함께 대저택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는 마리. 100퍼센트 완벽한 삶을 사는 듯하지만 그녀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2퍼센트가 아닌 98퍼센트가 부족하다. 마리의 삶에는 남편과 딸만 존재할 뿐이지, 정작 자기 자신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자기 삶의 주체가 아니다.
마리는 남편에게 항상 충실하며 남편을 예술가로서 존경한다. 하지만 남편은 예술에 대한 집착으로 과대망상증이 생겨 마리의 생명까지 위협하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화가를 꿈꾸는 마리에게 예술적 재능이 없다면서 꿈을 짓밟아 버린다.
그래도 마리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데, 남편이 어린 딸을 사냥개처럼 다루자 큰 충격을 받고 딸과 함께 스웨덴으로 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만난 음악가 휴고와 사랑에 빠진 마리는 남편에게 외도 사실을 고백하고 이혼을 요구한다.
이때부터 마리의 힘겨운 자아 찾기가 시작된다. 마리가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 진정한 사랑을 만나 주체적인 선택을 했다 해도, 그 시대 남들 눈에는 그저 막장 스캔들일 뿐이다.
마리가 그럴 수밖에 없는 타당한 이유 100가지를 댄다고 해도, 부도덕한 여자로 낙인찍혀 살아가야만 한다. 딸의 양육권과 사랑하는 휴고를 지키려면, 남편뿐만 아니라 세상의 편견과도 맞서 싸워야 한다.
그동안 마리는 남편을 사랑했기에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참고 버텼다. 마리는 남편만 사랑할 줄 알았지, 정작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삶의 벼랑 끝에 몰려서야 처음으로 주체적인 선택을 하지만, 마리는 그 순간부터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하게 된다. 남편과 명예도 잃고, 진짜 사랑이라 믿었던 휴고도 잃고, 삶의 전부였던 딸마저 잃었다.
정말이지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자아 찾기다. 그렇다면 21세기 지금은, 여자들의 자아 찾기가 순탄할까. 여성 고용률을 70% 달성하기 위해 시간제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정부 발표를 보면 썩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일자리 개수가 문제가 아니다. 그중에 여성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일자리가 얼마나 되느냐가 문제다. 자아 실현은커녕 열악한 환경에서 고용 불안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21세기에 사는 여성들한테도 자아 찾기는 미션 임파서블이다. 그런 의미에서, 19세기에 부도덕한 여자로 낙인찍히면서까지 자아를 찾겠다고 모든 걸 포기한 마리 크뢰이어의 용기가 대단할 뿐이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