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론에 희생된 선비 이야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6-02-08 19:5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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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INK:1} 성종 때 표해록(漂海錄) 지은 최부(崔溥)

요즘 벌어지고 있는 색깔논쟁을 지켜보노라면 역사 속의 비슷한 사례들을 떠올리면서 걱정스런 마음으로 오늘의 정치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필자는 고려대 사학과 박원호 교수의 최근 저서 ‘표해록 연구'를 읽고 있는 중이다.
표해록은 조선조 성종 시대의 문신 최 부(1454~1504)가 제주에서 근무하던 중 부친상을 당하여 급히 배를 타고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 끝에 중국의 절강성 해안에 표착, 일행 43명이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대운하를 거쳐 북경-요동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귀환하는 과정을 서술한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최 부가 한양에 도착한 직후 성종의 명에 따라, 표류로부터 귀국 여정을 일기체로 기록한 일종의 중국견문록으로서 당시 조선인이 쉽게 가 볼 수 없었던 중국 강남의 사정을 자세히 기술하여 조야(朝野)의 관심을 끌었다.

조선시대 최고의 명나라 견문록
주요내용은 1487년 당시 명나라(중국) 연안의 해로(海路)·기후·산천·도로·관부(官府)·풍속·군사·교통·도회지 풍경 등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경제적 효율성에 대하여 심도있게 서술하였고, 운하의 제방수문(堤防水門)에 대한 기록과 수문의 비문 내용은 중국 운하사(運河史)의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차(水車:踏車)의 제작과 이용법은 뒤에 충청도 지방의 가뭄 때 이를 사용케 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저서는 목판본으로 3권 2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근대 이전에 중국을 여행한 외국인이 남긴 기행기 중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가장 유명하다.

13세기에 중국에 온 그는 17년이나 체류하였으므로 견문은 매우 넓었으나 중국문화의 핵심에 대한 이해는 중국문화에 정통한 조선의 지식인 최 부와는 비교가 되지 못했다.
표해록이 일본에 흘러 들어간 이후, 일본인들은 일본어로 번역하고 널리 읽히도록 했다. 최근까지도 표해록에 관한 연구는 일본, 중국, 미국에서 활발하게 있었다.

전문연구자가 아닌 필자로서는 시간제약으로 박 교수의 저서 전체를 읽지 못하고 제4부
‘최 부의 표해록 연구기행-최 부의 발자취를 따라-’만을 읽었다.

이 부분을 읽어가면서 최 부가 겪은 참담한 무고와 왜곡, 끝내 맞고 마는 억울한 귀양과 참수가 근현대 우리가 겪는 시대상 (이념논쟁, 색깔론)과 그리도 비슷한지 처연한 심정이 들었다.

500여년 후 재연되고 있는 역사적 불행
최 부가 돌아오자마자 성종은 성급하게도 상중(喪中)의 최 부에게 표류일기를 써서 제출하도록 명했다.

하루 빨리 나주의 본가로 달려가서 복상(服喪)을 해야 하는 최 부는 마음이 다급했겠지만, 임금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효(孝)와 충(忠) 가운데 어느 것을 우선시해야 하는 갈등이 있었지만, 선택권은 최 부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성종은 탈상한 최 부에게 벼슬을 주려했다.
그러나 사간원측은 “그가 본국에 돌아와서 비록 일기를 지어 올리라는 왕명이 있어도 마땅히 글을 올려 슬픔을 말하고 바로 빈소로 돌아가야 했는데도 여러 날을 서울에서 묵으면서 태연히 일기를 쓰고 거의 애통한 마음이 없이….""라고 탄핵했다.

성종은 최 부를 그 뒤로도 몇 차례 옹호하고 벼슬을 옮기고 승진시켰지만 그때마다 임금의 신임을 받고 있던 최 부에 대한 비판의 화살은 멈추지 않았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최 부는 무서운 정치적 폭풍에 휘말리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김종직(金宗直)으로 대표되는 사림파가 훈구파로부터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되는 무오사화에서 김종직의 문인인 최 부는 함경도 단천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6년 뒤의 갑자사화에서 더욱 중형을 받아 참형에 처해졌다.

사관(史官)은 <실록>에서 “최 부는 공정·청렴·정직하고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였으며, 문사(文詞)에 능하였다. 간관(諫官)이 되어서는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회피하는 일이 없었다…. 이에 죽음에 이르니 조야(朝野)가 모두 애석해하였다""라고 썼다.

2006년 2월6일에 벌어진 국회 인사청문회를 지켜보는 눈길이 왜 자꾸 500여년전의 선비 최
부 선생의 비극에 옮겨지는가.
18년 전 장관 내정자가 저술한 저서의 지엽적인 부분을 침소봉대해 ‘친북좌파'라고 언성을 높이는 과거 중앙정보부, 안기부 파견 검사출신 국회의원들.

이들의 얼굴에서 왜 500여년전 무오사화. 갑자사화 당시 양심적인 젊은 사림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훈구·보수파의 그림자들이 어른거릴까.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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