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지난 5월25일 엔론 회계부정 사건을 심사해 온 텍사스주 휴스턴 연방법원 배심원단은 창업주인 케네스 레이(64) 전 회장, 제프리 스킬링(52) 전 최고경영자(CEO)에 대해 유죄 평결을 내렸다. 두 사람은 평생을 감옥에서 살게 된 것이다.(예상되는 최고형기는 레이는 45년형, 스킬링은 185년).
미국에서는 ‘경제범과의 전쟁’이 벌어졌고 한국에서는 ‘화이트칼라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됐다. 전쟁의 이름은 달랐지만 대기업 경영진의 불법경영에 대한 단죄라는 점에서는 같았다. 그러나 두 나라의 사회여론은 완연히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에서는 ‘누구든 주주를 속이면 처벌을 받아야 하며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시장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여론에 대해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한국자동차공업협회와 현대·기아자동차협력회 등 3개 단체가 이날 정 회장에 대한 탄원서에 200만명 이상이 서명했다고 밝히며 사법부에 조직적으로 정 회장 보석을 압박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언론들은 정 회장이 없어서 현대차와 한국의 자동차산업, 나아가 한국경제가 얼마나 결딴나고 있는가를 증명하느라 여념이 없다.
이러니 범죄 규모로 봐도 엔론보다 훨씬 큰 액수이고 범죄의 질로도 훨씬 악질적인 정 회장이 수사에 전혀 협조하지 않고 있으면서도 보석을 신청하는 후안무치를 보이는 것이다.
엔론의 경영진은 최대 6억 달러(원화로 환산하면 5000억원)의 분식회계를 저질렀다. 그러나 정 회장은 특정 계열사를 밀어주고 주가조작을 하여 아들(정의선 씨)에게 수조원대의 이익을 챙겨줬다. 또 계열사에 10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케 하여 정관계 로비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용돈으로까지 사용하였다.
미국 사회는 이 정도의 범죄를 용서하지 않았다. 엔론은 파산했고, 한때 총 380억 달러어치에 달했던 엔론의 주식은 휴지조각으로 변했다. 미국 사회는 그것으로 일을 마무리 짓지 않았다. 대기업의 회계 부정이 잇따라 드러나자 미 의회로 하여금 ‘사베인-옥슬리법’을 제정케 하는 등 강력한 보완책을 마련했다.
이 법은 미국 연방정부가 2002년 제정한 회계개혁법으로 증권사 및 투자은행 주요 관계자, 상장회사 자금담당자, 기업의 회계 데이터 등을 의무기간 동안 보관토록 규정하고 있다. 또 기업 내부 감독관을 두어 불법경영을 사전 예방하도록 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그나마 경영민주화를 위해 실시되고 있는 사외이사제도도 형식적 운영으로 전혀 견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정 회장의 전횡과 범죄가 그것을 웅변한다.
민주노동당은 재벌체제 이후의 기업구조로 “노동자 경영참여제도 확충, 기업 출연에 기초한 노동자소유기금의 설치 등을 통한 ‘민주적 참여기업’으로의 전환을 촉진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해왔다.
재벌과의 가장 첨예한 전선이 쳐져 있을 때 노동자가 기업과 세상의 중심임을 밝힐 수 있는 ‘민주적 참여기업’을 재벌구조의 대안으로서 민주노동당은 더욱 제기할 필요가 있다. 재벌이라는 암적 경영인이 없어도 노동자들은 너끈히 기업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설득해야 한다.
대우건설, 대우조선해양 등 재벌체제가 망친 기업을 노동자들이 되살렸고, 현재 해당기업 우리사주조합이 직접 지분을 인수하겠다며 나서고 있다. 지금도 우리사주조합의 제도·운영상 결함을 고칠 필요성이 있지만, 이런 척박한 구조에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기업을 운영하겠다고 실천에 들어간 것이다.
재벌체제를 대신할 수 있는 움직임들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많은 언론은 국민의 막연한 불안감을 역이용하고, 정 회장에 대한 사법부의 선처를 강요하는 여론을 조성 중이다. 사회가 원하는 제도개혁으로 나아가기는 커녕 범죄인의 처벌까지 가로막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한국중공업 등이 재벌에게 인수되는 과정에서 회사의 안정적 발전과 무관한 재벌의 분탕질에 노동자와 사회가 고통을 받았다.
이 고통을 사전에 예방하고 사회경제를 건실하게 발전시킬 노동자의 대안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면 노동계급조차도 민주노동당을 대안으로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민주적 참여기업’론이 반재벌전선의 힘찬 기치가 되는 날 당은 당당한 정치적 대안으로 인정받게 될 것임을 당 활동가들은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이 글의 전문은 민주노동당 홈페이지(www.kdip.org)에 게재돼 있습니다.>
위 글은 시민일보 6월 14일자 오피니언 5면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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