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오바마’까지(2)-2대 대통령 ‘존 아담스’(1735~1826)

김유진 / / 기사승인 : 2009-11-22 13: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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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영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원 (신보영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원)

미국의 두 번째 대통령 ‘존 아담스’는 후세에 더 평가받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Founding Fathers’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컸었던 인물로, 뛰어난 문장력과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미국독립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

특히 독립전쟁 중 유럽으로 건너가 미국 최초의 외교사절이 되어 독립국가의 위상을 정리하는데 공을 세웠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초대 부통령으로 조지 워싱턴과 함께 신생국가 미국을 이끌었다.

1796년 절친했던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토마스 제퍼슨’과의 대결에서 예상 밖의 접전을 벌이게 되지만 세 표의 작은 표차로 대통령자리에 오르게 된다.

대통령 선거에서 차점자가 부통령이 되는 당시의 규칙에 따라 경쟁자 제퍼슨을 부통령으로 맞이하는데 이들의 불편한 관계는 아담스의 정치활동에 큰 걸림돌이 되었고 이는 아담스가 대통령으로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기지 못하는데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고 만다.

게다가 4년 뒤 펼쳐진 두 번째 선거에서 자신의 지지세력이었던 연방주의자들의 분열과 이를 기회로 삼은 제퍼슨의 공격적인 선거전략에 밀려 재선마저 실패를 하게 된다.

선거 실패 후에는 고향인 메사추세츄 브레인 트리에서 농장 일을 하며 많은 글을 남기게 되는데 이 글들은 주로 자신에게 쏟아졌던 논쟁들에 대한 해명과 신정부의 나아갈 길 등에 관한 내용들로서 미국 역사에 값진 유산으로 남게 된다.

훗날 다시 회복된 그의 이미지는 그의 아들 ‘존 퀸시 아담스’가 제6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정치 활동을 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1826년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존은 최장수 대통령이라는 기록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이 기록은 무려 175년간이나 지속되다 2001년이 되어서야 ‘로널드 레이건’에 의해 바뀌게 되고 이는 또 다시 2006년 93세로 사망한 ‘제랄드 포드’에 의해 갱신된다.

‘존 아담스’의 삶을 들여다보면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그는 미국 최고의 정치가문을 이룬 사람이다. 우리는 흔히 케네디가를 미국 최고 정치가문으로 꼽는다.

그 뒤로는 아버지와 아들 두 명이 모두 대통령이 된 부시 가문이 아닐까 보여진다.

그러나 미국 최고의 정치가문은 누가 뭐래도 ‘존 아담스’의 집안이다.

‘존 아담스’ 가문은 존 자신을 필두로 외교관, 장관, 의회대표 등 다수의 정치인을 배출하였음은 물론 ‘부시’ 부자가 기록을 깨기 전까지 미국 역사상 유일한 부자 대통령이었다.

또 미국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유명 정치인 ‘샤뮤엘 아담스’가 바로 그의 사촌이기도 하다.

둘째, 그가 미국에 정착한지 100여 년이 지난 청교도 집안의 6세대라는 점이다.

이미 오랜 시간을 신대륙에서 보낸 토박이 중에 토박이였던 그가 독립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100년이라는 세월은 이주민들이 신대륙에 정착을 이룬 후 이방인이 아닌 주인으로서의 인식을 자각하는데 충분한 시간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건국 역사 61년을 견주어 볼 때 이해가 더욱 쉽다.

셋째, 그는 법과 질서체재를 옹호하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하버드를 나와 23세에 일찌감치 변호사가 된 그는 당시 법규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철저히 신봉했다.

이런 원칙주의는 그로 하여금 보스턴 학살사건에 연루된 영국군들을 변호하게 하였고 그의 공정한 변호로 말미암아 기소된 영국군 8명중 6명은 무죄판결을 또 다른 2명은 과실치사로 비교적 낮은 형의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

한동안 영국군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오해와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공정함은 오히려 식민지라 무시당하며 무질서하게만 비춰지던 미국의 이미지를 바꿔놓는 괜찮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미국인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넷째, 그는 조용하고 차분하면서도 냉철하고 합리적인 정치인이었다.

그가 정치인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대륙회의에 참석했을 때부터였다.

그는 독립선언문 작성에 참여 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륙회의에서 동 선언문이 채택될 수 있도록 의회를 설득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주변을 선동한다기보다는 차분하게 이해시키고 설득하여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무게 있는 정치 스타일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이런 그의 성격은 당시 함께 정치무대에 섰던 그의 사촌 ‘샤뮤엘 아담스’의 격정적인 성격과는 비교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결과, 격렬한 이미지의 샤뮤엘이 먼저 유명해졌어도 원칙을 지키는 차분한 존이 나중에는 더욱 인정받게 된다.

다섯째, 대통령으로서 그는 크게 두드러진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임기 내내 벌어진 연방주의자와 반 연방주의자들의 대립과 갈등이 그에게 제대로 일할 기회를 주지 않고 만다.

특히 당시 부통령이었던 제퍼슨과의 불편한 관계가 쉬운 일 조차도 어렵게 만들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방주의자들의 구심점이었던 ‘조지 워싱턴’의 사망으로 지지세력은 와해되고 같은 편이라 여겼던 해밀턴마저 그의 지도력을 의심하며 흠집을 내고 다녀 결국 재선에는 실패하게 된다.

결국, 그는 당시 가장 훌륭한 정치인이었음에도 정치계의 분열과 갈등으로 대통령으로서의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하게 된다.

잠깐, 그와 절친한 친구였으며 경쟁자였던 제퍼슨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그들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바로 연방주의 수위를 놓고 벌어진 대립에서 비롯된다.

연방주의자였던 아담스와 반연방주의자였던 제퍼슨은 자연스레 거리가 멀어졌으며 두 번의 대통령 선거 대결은 둘의 사이를 꽁꽁 얼어붙게 했다.

첫 번째 대결은 아담스가 승리를 거두었지만 두 번째 대결은 앞서 언급했듯이 제퍼슨이 승리 하게 되고 제퍼슨의 적극적인 선거공략은 둘의 사이를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고 만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어 보이던 둘의 관계는 한참 후 두 사람이 모두 대통령에서 물러나고 나서야 화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데 말년에 끈끈했던 그들의 우정은 화해 이후 14년에 걸쳐 주고받은 158통의 편지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더군다나 이 편지들은 뛰어난 문장력과 더불어 세상을 통찰하는 깊은 안목들을 담고 있어 지금까지 전해지며 미국역사의 값진 유산이 되어 남아있다.

우리는 정치권에서 파벌간의 대립과 갈등을 흔히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런 대립과 갈등은 이념이라는 장애를 초월해서 화합과 협력으로 이어졌을 때 비로소 원칙이 지켜졌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이라는 공동의 관심사가 사라진 개국 초기 미국에서 연방과 반 연방이라는 논제는 정치권 분열에 불을 붙였고 어려움 속에서도 존은 권력을 이용한 무리수의 정국주도는 피하려 했다.

오히려 외교를 통한 국제관계개선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국내의 갈등이 고조되지 않도록 노력했는데 원칙을 지키려했던 이런 그의 모습이 훗날 그를 더 높게 평가하게 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당시의 이념대립이 연방, 반 연방이라는 제목으로 갈리긴 하였지만 사실, 자세히 내막을 들여다보면 결국 소득과 분배라는 경제논리의 지배를 받고 있음은 물론이요 정치인들의 밥그릇 투쟁과도 전혀 무관하지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권의 관심에서 공과 사의 구분이 경계 없이 갖는 모호한 개념에는 큰 변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지금의 한국 정치권을 향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존은 임기 종료직전 지금의 백악관인 프레지던샬 맨션에 최초로 입주하게 되고 미완성이었던 그곳에서 나라의 앞날에 희망을 기원하며 기도를 올리게 되는데 그 기도문은 현재 백악관의 벽난로 장식에 깊이 각인되어 지금도 변함없이 미국과 미국인들의 앞날을 축복 하고 있다.

"천국의 축복이 이 건물에 내리기를 기원하며 오로지 진실한 현자만이 이 건물의 지붕아래서 나랏일을 볼 수 있게 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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