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오바마’까지.-4대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1751~1836)

김유진 / / 기사승인 : 2009-12-13 12:3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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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영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원 (신보영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원)

“세상사람들이 모두 천사 같다면 정부라는 권력기관은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미국의 제 4대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이 남긴 말이다.

그의 말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개인의 권리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상당부분 제한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특히 이 말은 민주화 과정에서 자주 목격되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논쟁에서 약과 독으로 함께 쓰이는 인용구로도 유명하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건강이 나빠졌을 정도로 학문에 깊이 심취했던 ‘제임스 메디슨’, 그는 다소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주장만큼은 매우 적극적이었던 인물로 전해지는데 그의 차분하고 온순한 이미지와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열정은 결국 그를 당대 최고의 정치가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건국 아버지(Founding Fathers)중에서 따로 ‘헌법 아버지’라 구분돼서 불리는 특별한 사랑까지 받게 한다.

그럼 그의 일생을 간략히 정리해 보자!

그는 그의 전임 제퍼슨과 같은 지역, 버지니아에서 부유한 지주의 큰 아들로 태어났다.

학문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던 그는 과도한 공부로 건강이 나빠졌을 정도로 아주 심한 공부벌레였다.

지금의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을 포함한 다양한 주제에 대해 교육을 받았고 특히 연설과 논쟁에 관한 과목에 관심이 높았다고 한다.

성인이 된 그는 해밀턴’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연방주의자의 입장을 갖고 정치에 입문하는데 헌법제정뿐 아니라 결의 과정에서 눈에 띄는 역할로 인상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난항을 겪고 있던 헌법결의가 ‘권리장전(Bill of Rights)’ 작성 제안으로 가닥을 잡아갈 무렵 메디슨은 헌법에 이미 명시된 부분을 다시 언급한다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며 반대 입장을 보였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헌법 수정안으로 남게 되는 이 ‘권리장전’의 작성에 가장 깊숙이 참여하는 인물이 되고 만다. 결국 그에 의해서 12개항의 초안이 작성되고 그 중 10개항이 채택되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 온다.

메디슨은 권리장전 작성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인생을 송두리째 바꿀만한 큰 심경의 변화를 갖는다.

연방주의자에서 반연방주의자로의 입장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그 이유들 중에는 해밀턴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연방주의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컸던 해밀턴은 조지 워싱턴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또 그는 미국에 유럽식의 왕정과 귀족정치를 도입하려고도 했었다.

해밀턴의 의중을 간파한 메디슨은 수정안 작성과정에서 연방정부의 과도한 권력이 가져오게 될 불합리성에 대해 보다 더 인식하게 되었고 이후 그의 입장은 180도 바뀌게 된다.

메디슨은 계속해서 권력의 심한 편중을 견제하기 위해 삼권분립(Check and Balances)을 제안하게 되고 그의 정신은 아직도 많은 나라에서 이상적인 정치철학으로 평가를 받으며 연습되고 있다.

반연방주의자로 모습을 바꾼 그는 민주공화당의 핵심인물로 떠오른다.

그럼에도 메디슨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민주 공화당의 2인자 ‘부어’ 부통령이었다.

‘부어’ 부통령은 당내에서 제퍼슨과 당당히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유일한 인사로서 제퍼슨의 임기 만료시 유력한 차기 후보였는데 1804년 뜻밖의 일로 재기할 수 없는 깊은 늪에 빠지고 만다.

평소 남의 흉을 많이 보던 ‘해밀턴’이 파티에서 ‘부어’의 약을 올리는 일이 발생하는데 바로 대사건의 전주곡이었다.

‘해밀턴’의 말에 화가 난 ‘부어’는 결투를 신청했고 다음날 벌어진 ‘결투(유럽식 결투로 두 사람이 권총을 들고 등을 마주한 상태에서 열 걸음을 앞으로 전진한 뒤 돌아서서 한방씩을 쏘게 된다 이때 서로에게 총상을 입히지 못하면 화해와 함께 결투를 끝냈었다고 한다)’ 에서 ‘부어’는 ‘해밀턴’을 죽이게 된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부어’는 미국 역사상 부통령이면서 대통령에 오르지 못하는 첫 번째 인물로 기록이 된다.

메디슨은 자연스럽게 당내 2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제퍼슨의 후광과 함께 쉽게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대통령이 되어서 일어난 일은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영국과의 전쟁이고 둘째는 중앙은행의 재 설립이다.

먼저 국제사회에서 무시당하는 미국의 입장 제고를 위해 전쟁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 결과는 참담했었다.

친불반영이었던 그는 반연방주의자답게 영국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는데 당시 영국령이었던 캐나다가 공격의 대상이 되었었다.

하지만 미국은 예상과는 달리 많은 전투에서 패하게 되고 수도 워싱턴까지 함락당하여 백악관이 불에 타는 수모를 겪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유럽에서 나폴레옹이 격퇴되고 전쟁에 지친 유럽은 더 이상의 전쟁을 원치 않게 된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겐트조약(네덜란드 겐트에서 맺은 평화조약)을 통해 영국과의 전쟁을 끝내고 다시 평화를 찾게 되지만 최초 전쟁의 목적을 상실한 소득 없는 소비전으로 기록되고 만다.

임기가 끝날 무렵, 그는 평소 철저하게 반대했던 중앙은행의 설립을 추진하게 되는데 이는 영국과의 전쟁을 통해서 미국이 직면하게 될 안보의 위협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전쟁지원에 비협조적이었던 주정부들과 자금 확보의 어려움을 패전?의 원인으로 분석하고 있던 그는 강력한 연방정부의 구성을 중앙은행 설립이라는 자금창구 확보를 통해 이루고자 했음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처음 연방주의자에서 시작하여 반연방주의자로 그리고 이제 다시 친연방주의자로 모습을 바꾸게 된다.

1817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기록들을 정리하면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 있을 자신의 평가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기록 속의 내용들을 마구 고쳐대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심한 편집증 증세를 보이기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공부벌레 메디슨, 나쁜 건강으로 인해 마흔이 넘어서야 겨우 장가를 가게 되었지만 자식은 두지 못했던 그, 혹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피해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편집증이 두둔할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나름 유익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의 모습과 비교할 때 더욱 그러하다.

임기를 마친 후 역사가 자신을 어떤 모습으로 평가할지에 대한 고민은 대통령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수립 후 우리의 대통령들은 이 부분에 소홀했던 것 같다.

대통령직의 올바른 수행이 최종 목적지라는 자명한 진리를 간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대통령 자리에 오름과 함께 책임역할 단계에서 권력행사 단계로 전술 전환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정치권의 깊은 자기성찰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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