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임기간: 1829-1837 / 2선 / 민주당
미국에는 군 장성 출신의 대통령이 모두 12명이 있다.
12명 모두가 뛰어난 지휘관으로 또 전략가로 묘사 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앤드류 잭슨의 전쟁 무용담은 미국 역사 속에서 가장 시원한 기록이 될 듯하다.
굳이 비교 한다면 미국의 한산대첩이었다고나 할까?
1812년, 영미 전쟁은 미국의 계속되는 참패로 사기가 떨어질 때로 떨어진 시기였다.
바로 그때 뉴올리언스에서 한 통의 승전보가 날아오는데 바로 잭슨의 쾌거였다.
잭슨이 이끄는 미국의 민병대는 수적으로 우세했던 영국의 정규군을 크게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는데 영국군의 피해는 사상자가 20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막대했다고 한다.
반면 잭슨 민병대의 피해는 십 분의 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 수백명에 불과 했다고 하니 미국인들로서 어찌 속 시원한 전과가 아니었겠는가?
이날의 승리는 지형지물을 잘 이용한 전략과 뛰어난 지휘력으로 이뤄낸 미국인들의 쾌거였고 잭슨은 이로 인해 일약 스타로 거듭난다.
미국인들은 전투결과에 크게 만족했지만 안타깝게도 전쟁종료 선언인 겐트조약 이후 조약 체결소식을 접하지 못한 사이에 벌어진 전투였기에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이 전투로 명성을 얻은 ‘앤드류 잭슨’은 정치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고 얼마 후 미국의 제 7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앤드류 잭슨’, 그는 미국의 어느 역대 대통령과도 구분되는 과거를 가지고 있다.
바로 부모형제를 모두 잃고 혈혈단신으로 어려운 성장과정을 보낸 전형적인 자수성가 인물상이다.
빈털터리 고아의 모습에서 노예를 150여명이나 거느린 대 농장주로 변신해 가는 모습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정규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했던 그가 변호사가 되고 지주가 되며 또 장군이 되는 인생 역정의 모습 또한 결코 평범하지 않았으리라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그의 삶이 얼마나 거칠고 험했는가는 그의 일화 중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그가 13번의 결투를 치르고서도 살아남은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두 사람이 마주보고 총을 겨두는 결투를 열 세 번씩이나 했다니 그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이는 그가 얼마나 지독한 사람이었으며 또 신의 가호를 늘 받고 있었다는 면을 알 수 있게 해준다.
13번이나 목숨을 건 결투에 휘말렸다는 얘기는 바꿔 말하면 그의 인생이 매우 변화무쌍하며 평범치 못했단 말이기도 하다.
180센티가 넘는 큰 키에 65킬로그램 밖에 되지 않았던 그의 인상은 매섭고도 특이했으리라 보인다.
그러나 독하고 질기게 보였던 그도 결투 중에 얻은 부상으로 인하여 평생을 몸속에 총알을 둔 채로 살아가야 했는데 후유증에 의한 고통이 죽을 때까지도 그를 괴롭혔었다고 한다.
하지만 후유증에 의한 고통 속에도 그는 78세라는 고령의 나이까지 장수한 인물로 남는다.
잭슨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전편에 언급한대로 잭슨의 첫 번째 도전은 존 퀸시 아담스에 의해서 좌절된다.
이는 최고 득표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패배한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되는데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잭슨은 4년 뒤 보복이라도 하듯 큰 표차로 아담스를 제치고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당시 미국의 정치상황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누가 뭐래도 노예제도를 두고 벌어진 남부와 북부간의 대립이 최대 이슈였다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남북전쟁에서 남부가 패하며 균형이 깨질 때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다.
남과 북의 대립은 경제권의 주도를 권력의 다툼에서 얻고자 했던 사회지배 계급들의 갈등 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을 대통령으로 내세우고자 혈안이 되었었고 노예제도를 반대했던 아담스에 비해서 전쟁영웅이며 노예제도에 특별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던 잭슨이 남부와 북부인 모두에게서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된다.
적극적인 지지세력을 기반으로 한 잭슨은 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이 과정에서 훗날 잭슨니즘 이라 불리게 되는 잭슨식 민주주의의 선봉이 되기도 한다.
민주 공화당에서 옷을 갈아입고 민주당으로 다시 태어난 잭슨과 그의 추종자들은 그 후에도 한동안 그들의 정책기조를 이어가는데 바로 오늘날 미국 민주당의 탄생을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 잭슨은 워싱턴 정가에서 그리 환영받지는 못했었다고 한다.
그의 성장과정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 그는 상류사회의 기품을 갖추고 있지 못했는데 이를 두고 일부는 서민적이며 친밀함을 준다고 평했지만 많은 이가 무식하고 저속하다는 평을 했었다고 한다.
때문에 서민들에게 더욱 친밀하게 느껴지는 민주당의 이미지는 이런 연유에서도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잭슨이 노예를 150여명이나 거느렸던 대지주였다는 사실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잭슨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정국을 주도한 주제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가 앞서 언급한 노예제도이고 두 번째가 중앙은행의 재인가를 두고 벌어진 양당간의 대립이었다.
노예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가 있고 또 계속해서 글이 연재되는 동안 언급해야 할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에 잠시 옆으로 밀어두기로 하고 중앙은행의 재인가 건을 살펴 보기로 하자.
중앙은행은 간단히 말해서 연방정부의 돈 줄이다.
연방정부는 중앙은행을 통해 채권을 발행하고 예산을 맘껏 집행하게 된다.
대규모 국책사업이나 불황으로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금고쯤으로 생각하면 맞을 듯싶다.
하지만 이에 대한 입장은 제각기 다르게 나타나는데 미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중앙은행의 설립은 강한 연방정부의 탄생과 주정부의 상대적인 약화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진보성향의 정치인들이 특히 반대했던 정책이었다.
하지만 국가의 안보와 빈민구제 그리고 장기적인 국가전략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자금확보가 필요했고 이는 중앙은행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이유때문에 4대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은 평생을 반대했던 중앙은행의 재설립을 찬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앙은행의 인가기간의 만료가 가까워지자 이에 대한 논쟁이 뜨거워지기 시작하였는데 잭슨의 입장은 확고했다.
중앙은행의 재인가 반대였다.
대규모 국채발행으로 후손들에게 빚을 떠넘길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고 은행에서 파생되는 금융권력에 대한 견제론(쑹홍빈의 ‘화폐전쟁’에서) 역시 전혀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1835년 있었던 암살미수사건 역시 이런 맥락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보는 시각도 큰 무리는 아닐 듯싶다.
어쨌든 작은 정부를 원했던 잭슨의 민주당과 큰 정부를 주장하는 오늘날의 민주당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강하고 매서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앤드류 잭슨’ 그가 미국인들에게 사랑받는 역대 대통령이기는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미국 역대 정권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그 역시 인디언들에 대해서만큼은 가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디언들을 모두 죽여라!”란 그의 어록도 그가 잔인하고 호전적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특정 미국인의 훌륭한 대통령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만민의 대통령만큼은 영원히 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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