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점점 더 법에 규정돼 있지 않은 새로운 사회현상이 일어나고 그것들이 많은 대중매체에 노출돼 있기에 우리는 법이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법대로’만 하면 살맛나는 세상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우선 ‘법망’을 피해 교묘히 빠져 나가는 지배층의 행태는 과연 누구를 위한 법인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최근 개봉한 영화인 ‘모범시민’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생각나게 한다. 그리스 철학자인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편익이라고 했다.
즉 힘 있는 자는 법이란 정의를 자신의 입맛대로 주무를 수 있고 힘없는 자는 그 정의가 오히려 해만 입히는 것으로 인식돼 전사회적인 법불신풍조를 낳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법을 만든 주체가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그 사람이 심판하는 법 또한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위태양을 법조문에 따른 판사의 해석에 맡기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까. 현대사회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해관계로 점철돼 있고 때때로 각 행위는 나름의 타당성을 가진 변호사의 변론을 등에 업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의 잘잘못을 가리는 일이 ‘내가 정말 죄를 지었고 진심으로 뉘우친다’ 라는 교정의 효과를 거두기 보다는 ‘내가 상대방보다 힘이 부족해서 싸움에서 진 것 이상은 아니다’ 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또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현상을 입법작용은 뒤따르지 못해 법망의 공백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법치주의만으로 인간세상을 이끌어가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필자는 그 보완책을 동양의 사상에서 찾아보려한다. 동양에는 법치주의를 주장하는 한비자의 관점이 있고 덕치·예치·인치를 중시하는 공자의 관점이 있다. 아버지의 죄를 아들이 이실직고하는데 있어 공자는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법보다 위에 있는 덕에 위반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예기>에서 예는 서민에게 미치지 않고 형(刑)은 대부에게 미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즉 서민들은 예가 없기 때문에 법으로 다스리고, 대부는 예가 있기 때문에 법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다. 즉 공자는 법 없이도 사는 대부들의 세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법률에 정해진 바대로 행위하게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과 양심의 힘으로 규범을 자발적으로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조화돼야 한다. 법치를 어긴 자신의 행동이 잘못이라는 것을 반성하고 교화되는 예치의 과정이 조화를 이뤄야 진정한 사법작용이 이뤄진다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법을 통한 법없는 세상을 꿈꾼다. 경찰은 일선치안현장에서 최전방 판사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서민들의 삶과 가장 밀착한 경찰이 지역사회와 소통을 부담스러워하고 법대로만 처리하려는 것은 가벼운 범죄에 대한 훈방권이 인정되지 않는 현실과 언론의 뭇매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일 것이다.
지역사회의 작은 판사인 경찰이 기계적인 법적용이 아닌 인간적인 법적용을 통해 예치와 법치가 조화되는 지역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기 위해서는 경찰에게 훈방권이 인정되는 것과 동시에 처벌을 받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다기보다는, 죄를 지으면 개인의 양심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 누를 끼친다는 죄책감에 죄를 짓지 않으려는 시민들의 의식전환이 요구된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