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임기간: 1837-1841 / 단임 / 민주당
1837년 치러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마틴 밴 뷰런은 앤드류 잭슨의 후계자임을 표방하면서 큰 차이로 승리를 거머쥐고 토마스 제퍼슨으로부터 시작된 반연방 진보세력의 득세를 이어나갔다.
뷰런이 전임자 잭슨의 후계자를 표방하고 나선 데는 잭슨의 인기가 아직 식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잭슨의 오른팔이었기 때문이다.
1824년 대선 패배의 쓴맛으로 예민해진 잭슨에게 그는 최고의 브레인이었으며 4년 뒤 대선에서 잭슨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가장 큰 주역이었다.
때문에, 잭슨은 뉴욕 주지사에 당선 된 그를 초기 내각 국무장관으로 불러들였고 이후 후기 내각의 부통령으로 그리고 또 대통령 자리를 승계할 후임자로 뷰런의 손을 들어 주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뷰런이 이토록 잭슨의 눈에 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타고난 정치가였으며 사람을 모으고 선동하는데 특별한 재주를 지닌 지략의 소유자였다.
많은 역사가들은 현대식의 양당정치, 계파정치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은데 그의 정치성향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듯싶다.
어쨌든 그는 정치활동 중 주변의 예상을 뒤엎는 이변을 수차례 일으킨다. 이런 일들은 그에게 ‘작은 마술사’라는 별명을 안겨줌과 동시에 정적들로부터 ‘킨더후크의 붉은 여우’라 얄밉게 불리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결국, 잭슨의 재임 기간 중 막강한 정치력을 휘두르며 당내 2인자의 자리를 굳게 지키게 되고 나중에는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그의 성장과정을 살펴보면 더 자세히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을 성장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위인들에게서 흔히 보게 되는 공통점을 찾게 되는데 교훈으로 삼아야 할 중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가난한 네덜란드계 이민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함을 보였지만 그의 부모는 재정 형편상 그를 좋은 학교에 보내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역내 학교과정을 마친 그는 형이 근무하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주경야독하며 법학을 독학해 결국 변호사가 되고 만다.
그의 성장 과정에서 엿볼 수 있듯 그 역시 다른 역대 대통령들과 더불어 뛰어난 지적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의 정치력은 단지 그의 지적인 판단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역사가들이 부모가 준 영향을 많이 언급하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여인숙을 운영하던 그의 아버지는 평소 후덕한 성격의 소유자로 남에게 원수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반면 그의 어머니는 주도면밀하고 매사에 빈틈이 없는 꼼꼼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분위기의 집안에서 성장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처세술을 익히게 되었고 이는 그가 정치적으로 성공하는데 필요한 기름진 양토가 되었다.
훗날 그는 회고록에서 집안의 가훈을 ‘후덕함과 주도 면밀함은 성공의 양 날개다’라고 소개 하는데 바로 위와 같은 배경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어서는 이와 같은 그의 성격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인기는 추락하여 큰 표 차이로 재선에 실패하고 만다.
그의 주도면밀했던 성격은 민감한 정책들의 실행을 주저하게 만들었고 또 그의 후덕함은 우유부단으로 이어지기가 허다했는데 과감한 결단을 필요로 하는 국가정책들은 이로 인해 그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았었다고 한다.
지략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표심을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실전에는 약했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가 인기를 얻지 못 한데는 부족한 결단력뿐 아니라 심각했던 당시 경제상황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를 못한다’는 옛말이 있듯이 경제 상황이 악화되어 생계유지가 어려워지면 그 비난의 화살은 예나 지금이나 모두 나라님에게 쏟아지게 되어 있다.
뷰런 역시 자신의 임기와 함께 시작된 경제위기로 어려운 시간들을 겪었고 또 당시의 경제위기는 그의 결단력을 더욱 더 축소시키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때의 경제상황을 뷰런의 탓이 아닌 전임자 잭슨의 탓으로 돌리는 설도 있다.
그러나 잭슨 재임기간 중 중책을 맡고 있었던 뷰런으로서는 책임론에 마땅히 맞설 논리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잭슨의 정책을 그대로 승계하겠다고 큰소리치며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으니 더더욱 그러 했으리라.
결국, 1840년 치러진 대선에서 민주 공화당의 정통보수성을 승계하는 휘그당의 ‘윌리암 헨리 해리슨’에게 대패한다.
이로써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이후 진보세력에 의해 장악된 국정운영은 다시 보수 세력의 손으로 넘어가고 승승장구하던 진보성향의 민주당은 잠시 주춤하게 된다. (6대 대통령이었던 ‘존 퀸시 아담스’의 집권을 정통 보수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필자의 판단으로는 민주공화당의 당적과 당시 정통 보수로 여겨지는 연방파와의 결별에서 진보세력의 연속으로 보는 게 더 바람직 할 듯하다.)
뷰런은 이후 대통령 자리에 수차례 더 도전을 하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는 못한다.
특히 말년에는 당을 등지는 행동까지 보이게 되는데 1848년에 치러진 대선에서는 자유토지당을 창당하여 도전했지만 망신당했고 또 후엔 공화당 후보인 링컨을 지지하며 당과 결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위와 같은 그의 말년 모습에서 그가 평소 주창했던 계파정치나 정당정치는 오로지 손익계산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라는 가정 또한 해볼 수 있지 않나 보여진다.
어쨌든,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쓸쓸히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에 관한 일화 중 그의 평소 성격을 유추해 보는데 도움이 되는 대목을 하나 살펴보자.
그는 외모에 매우 신경을 썼던 인물이었다.
집무실 책상 서랍에 화장품을 넣어두고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도 그의 주도면밀함으로 봐 줘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서부 개척시대의 터프가이 이미지 속에서 화장하는 남자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정적들은 그를 웃음거리를 만들고 큰 망신을 주었다고 한다.
이미 추락한 그의 지지율에 찬물을 끼얹는 상황이었다.
텔레비전 출현 등으로 얼굴에 분 바르고 입술을 칠하는 지금과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 아닌가 보여진다.
마지막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기록들을 소개하면서 8대 대통령 마틴 밴 뷰런 이야기를 마칠까 한다.
먼저 그는 첫 번째 네덜란드계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미국시민으로 태어난 대통령이었으며 첫 번째 영어가 아닌 언어를 원어로 사용하는 대통령 이었다(네덜란드계로 성장하며 더치어를 원어로 사용했다고 함).
그는 또 존 아담스 부자에 이어 세 번째 단임 대통령의 기록으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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