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오바마’까지. - 10대 대통령 ‘ 존 타일러 ’ (1770 ~1862 )

안은영 / / 기사승인 : 2010-01-24 18: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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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영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원 (신보영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원)

재임기간: 1841-1845 / 단임 / 휘그당, 무소속.

1841년 3월 4일 부통령에 취임한 ‘존 타일러’ 는 다음날 상원에 참석하여 개회를 선언한 뒤 그 다음날인 5일 집으로 돌아왔다.

부통령은 상원의 의장을 당연 직으로 겸하고 있기에 그의 회기 중 귀향은 뜻밖의 일 일 수 밖에 없는데 더욱 특이한 사실은 그의 귀향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평소 몸이 약했던 그였기에 선거기간 동안 누적된 피로를 풀기 위함이겠지 정도로 가볍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가 워싱턴을 떠나온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권력의 그늘에서 갖게 되는 공허함 같은 것이었다.

모든 이들의 관심이 새로운 대통령에 게만 쏠려 있고 대통령조차 그를 찾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워싱턴에서 할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 되었다.

자신의 러닝메이트였던 헨리 클레이가 대통령 출마를 포기하고 실질적인 2인자로 등극 하면서 당을 장악하고 해리슨을 마음대로 조정하려 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상황은 선거가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권력의 중심에서 밀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취임식 다음날 워싱턴을 떠나 집이 있는 버지니아로 돌아간 진짜 이유 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버지니아에 머무는 동안 그는 해리슨의 건강 악화를 알지 못했다.

해리슨의 상태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진 4월 1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해리슨의 사망을 통보 받는 4월 5일 까지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혹시나 하는 오해의 소지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는데 사람의 속마음을 어찌 알 수 있으랴?

더군다나 잔뜩 서운해 있던 그였으니 그의 진심은 아마 본인만이 알고 있지 않았을까?

어쨋든, 해리슨의 사망소식을 접한 그는 서둘러 워싱턴으로 향하게 되었고 다음날인 6일 새벽 4시경에 도착하여 내각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서를 하고 대통령에 취임을 한다.

이로서 미국의 제 10대 대통령 ‘존 테일러’의 시대가 시작된다.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시작은 평탄 하지가 않았다. 예견했던 데로 클레이는 그를 직무대행 수준으로 인정하면서 자신의 섭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의회에서도 그를 정식 대통령으로 인정 하지 않으려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움직임들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대신 자신의 정통성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고 오히려 더 강한 자세를 취하게 되는데 한번은 참견하려는 클레이에게 “ 가시오! 미스터 클레이, 당신은 의회에 가서 당신 일이나 하시오! 나는 이곳에서 내일을 할 테니까!” 라고 말하며 직격탄을 날렸다고도 한다.

이토록 강경한 그의 모습은 클레이를 견제하는 세력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왔고 결국 두 달 뒤 6월 1일 의회는 그의 대통령직 승계의 정통성을 부여 하는 결의를 통과 시키게 된다.

이로써 그는 법적 하자가 없는 정식 대통령이 되어 새로운 전례를 만들고 이 같은 관례는 1967년 수정헌법 25조에 성문화되기 전까지 묵시적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존 테일러’. 그는 3대 토마스 제퍼슨, 4대 제임스 메디슨, 그리고 5대 제임스 먼로와 같은 버지니아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토마스 제퍼슨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버지니아의 주지사를 지낸바 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력은 그로 하여금 최고 앨리트의 과정을 밟으며 성장하게 했다. 법학을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었으며 이후 주 의회와 연방 하원 그리고 상원을 차례로 진출하며 정치력을 키워나간다.

그는 또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한 President pro tempore of the Senate(상원 부의장으로 의장을 겸직하는 부통령의 잦은 자리 비움으로 상당히 비중이 있음 ) 출신이기도 하다.

그의 집안과 제퍼슨과의 관계구도에서 추측해 볼 수 있듯 그 역시 처음에는 강력한 반연방 주의자였다.

그리고 민주당으로 정치를 시작 했었다. 잭슨의 불미스러운 기록을 삭제하려는 당론에 반대하여 당을 떠나게 되지만 휘그당에 합류한 뒤에도 그의 정치성향은 노예제도를 옹호하고 노예제의 선택에 대해서도 연방정부가 건드릴 수 없는 주의 고유권한이라 보는 입장이었다.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런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런 그의 포지션은 남북전쟁 에서 그를 남부연합 쪽에 서게 했고 주요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한다.

하지만 건강 악화로 전쟁초기인 1862년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죽음은 그로 하여금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국가적으로 애도를 받지 못하는 대통령으로 남게 하는데 이유는 당시 남부연합이 미연방정부의 땅이 아닌 적성지역으로 구분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재임시절 업적으로는 텍사스 합병을 최우선으로 꼽을 수 가 있다.

그러나 텍사스 합병에는 드리워진 속뜻이 있었고 합병으로 가는 길 역시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엄청난 넓이의 텍사스는 지금으로서야 미국의 국력을 증가 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었다.

멕시코가 텍사스의 독립을 인정 하지 않고 있어 호시탐탐 재탈환을 노리고 있었는가 하면 텍사스 합병을 재선의 밑거름을 만들고자 했던 테일러의 의도 역시 워싱턴 정가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텍사스를 합병하여 기존 정계의 구도를 흔들고자 했다.

자신이 재선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모습의 정치구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민주당과 휘그당 모두에게서 따돌림을 받고 있었다.

계속되는 클레이와의 반목으로 휘그당에서는 제명을 당했고 민주당에서 는 당적을 옮겼던 전력으로 오갈 데 없는 무소속 신세가 된 탓이었다.

게다가 관세문제나 중앙은행 문제 등에 대해 의회와 견해를 달리 하면서 거부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이는 또 의회의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지면서 진퇴양난의 어려운 상황을 가져오고 만 것이다.

비록 탄핵이 성공 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재선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민주당이나 휘그당이 아닌 새로운 제 3의 정당이 필요했고 텍사스 합병으로 정가의 구도를 흔들어 그 뜻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

뜨거운 논쟁을 거듭하면서 가까스로 텍사스 합병은 의회를 통과 하게 된다. 그리고 테일러는 자신의 임기종료를 3일 남겨둔 상황에서 공식문서에 서명을 하게 된다. 하지만 재선의 꿈은 이미 좌절된 후였다.

테일러 재임시 영토확장은 텍사스 뿐이 아니었다.

당시 국무장관으로 있던 ‘다니엘 웹스터’의 눈부신 활약으로 많은 외교 성과를 거두었으며 특히 잦은 영토분쟁으로 골머리를 알고 있던 국경을 정비하여 확정 지었는가 하면 플로리다를 주로 편입하기도 한다.

그의 사생활에 관해서도 재미있는 일화가 몇 가지 전해져 내려온다.

먼저 그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의회에서는 그에게 보내는 서한에 ‘수신자 부통령’ 또는 ‘대통령 직무대행’이란 호칭을 가끔 썼는데 이에 대해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었다고 한다.

이런 편지들은 대부분 개봉도 되지 않은 체 다시 돌려보내졌고 테일러에 의해 해당 안건은 무시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휘그당의 대통령 승계자로서 모든 장애를 당당한 모습으로 맞서고 독자노선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 했던 존 테일러, 하지만 그 역시 정치는 무리(패거리)를 통해서만 비롯된다라는 변치 않는 진리를 보여주며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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