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70세를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라고 해 불유구(不踰矩) 라고 했다. 이에 따르면 우리의 3.1절은 불유구의 나이를 훨씬 넘어섰으니 잔뜩 뒤엉키고 꼬인 역사의 매듭이 다 평정되고 성숙된 역사를 만들어갈 시기일 것이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을 보면 그 반대인 것 같아 지나간 세월에 대해 회환이 쌓인다. 91년전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당시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미뤄 짐작하기조차 싫은 암흑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식민통치 10년 동안 우리민족 고유의 문화는 말살당하고 우리 선조들은 우민화정책에 의해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을 수가 없었다.
또한 헌병경찰제도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 일체의 독립을 위한 결사와 언론활동은 금지 당했으며 조금이라도 조국의 독립에 뜻을 둔 사람들은 감시와 투옥 그리고 모진 고문 속에 조국을 떠나야만 했다. 어디 이뿐인가! 일본은 토지·광산·철도·금융 등 모든 분야의 이권에 개입해 경제적 침탈행위를 자행하면서 우리 민족의 생존권마저도 강탈해 버렸다.
이러한 일본이 폭압정치는 모든 국민의 반일감정을 불러 일으켰으며 외세로부터 자주독립을 이뤄야 한다는 민중의식을 성장시켰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고종황제가 일본인들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동안에 억눌린 반일감정은 하늘에 닿았고 마침내 고종황제 인산일을 계기로 독립의 결의를 뿜어내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됐다.
이렇게 시작한 3.1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몇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일어나면서 많은 희생을 내고 목표했던 자주독립은 이루지 못한 채 끝났다. 그러나 전 민족적인 봉기는 한낱 제국주의의 불쌍한 희생양으로만 여겨지던 한민족의 정체성을 세계인들에게 인식시키고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사를 전 세계에 천명해 결국에는 독립을 인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3.1만세운동은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탄생시켰다. 이를 통해 여러 갈래로 흩어져 전개되었던 독립운동이 하나의 구심점을 형성해 좀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고 마침내 조국의 광복을 이뤄낸 원동력이 됐다.
또한 3.1만세운동은 국내적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현대 중국 탄생의 전환점이라 할 수있는 5·4운동의 계기가 됐으며 인도의 비폭력 독립운동, 필리핀·이집트 등 세계 여러 나라의 독립운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어느덧 91년이 됐지만 청산되지 않고 정리되지 않은 과거가 불쑥불쑥 우리를 아프게 한다. 얼마 전 일본정부가 위안부로 일본에 끌려간 할머니들에 대한 보상금으로 99엔, 우리돈으로 약 1300원 정도를 지급하기로 판결해 온 국민을 분노케 하더니 이번엔 방송 예능프로에 출연한 일본인이 독도라는 이름을 일본이 만들었다는 말을 해 우리를 아연실색케 했다.
또 시마네현은 올해도 어김없이 ‘다케시마의 날’ 기념식을 열어 우리 국민들이 현지를 방문 항의집회를 열려다 일본경찰에 저지당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과거사에 대한 진솔한 반성 없이는 결코 진정한 선진국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을 일본인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며 우리들은 과거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과 광복을 위한 뜨거운 염원을 3.1절을 계기로 다시 한번 깊이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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