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김유진 / / 기사승인 : 2010-04-18 15: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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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종 경민대학 총장 (홍문종 경민대학 총장)

텔레비전 뉴스 시간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자식을, 그리고 남편을 부등켜안고 통곡하는 천안함 유가족들의 모습이 비친다. 안녕의 말조차 나누지 못하고 생사의 공간으로 엇갈려야 하는 이별의 모습이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 슬픔과 절망이 화면을 통해 고스란히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다. 과거의 경험들이 감정이입을 부추기는 탓이다. 덩달아 울컥해지며 눈시울을 붉히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가슴 아픈 이별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게도 몇 번의 이별로 아팠던 기억이 있다.

그 중 초등학교 시절 내 생애 최초로 이별의 아픔을 느끼게 했던 혜숙이가 떠오른다.

혜숙이는 어머니의 여고(이북의 경기여고라는 평양 서문여고) 동창의 딸인데 나와는 동갑내기로 단짝으로 지내던 사이였다. 그 혜숙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그만 서울로 전학을 가버리는 바람에 생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그땐 왜 그리 슬프고 섭섭했는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이별을 아파하는 유난을 떨었다. 그러다 급기야 열이 올라 병원을 찾는 바람에 어머니를 기겁하게 만들기도 했다.

또 다른 이별도 있다. 집에 유학와 있던 동갑내기 여학생이 있었는데 일정한 기간이 지나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비롯된 이별이었다.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옮기며 내 시야에서 멀어져가던 그 여학생의 뒷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을 정도다. 그날 하필 비가 왔는데 여학생이 떠나고 난 뒤 뒷동산에 올라가 비를 맞으며 무슨 시인이나 된 것처럼 폼을 잡기도 했다.

이후의 이별은 대학교 때 교제하던 아가씨와 헤어졌던 일이다.

정초가 되어 집에 세배 온 아가씨에게 아버지께서는 ‘우리 집은 세배 안하는 집’이라는 말씀으로 거부의사를 밝히셨다. 아버지의 의도를 알아차린 아가씨는 한없이 울면서 떠나갔고,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던 나는 한동안 심마니라도 된양 설악산이다 지리산이다 하며 미친 듯 산을 찾는 것으로 이별의 아픔을 달랬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내가 잘해주지 못했던 동생의 죽음이나 누구보다 나를 친자식 이상으로 아꼈던 이모부, 백부를 비롯한 장인장모와의 사별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내게 엄청난 슬픔이었다. 하지만 앞서 서술한 이별들은 또 다른 이유로 내 기억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함께 하던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힘겨운 슬픔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못할 짓이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어 겪게 되는 이별은 훨씬 더 날카로운 충격과 오래가는 슬픔으로 남게 되는 것 같다.

요 근래 정말 가까이 마음을 주던 사람으로부터 이별을 통보 받았다.

다시는 나를 만나지 않겠다며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라는 그의 말이 지금도 가슴의 통증으로 남아있다. 너무나 뜻밖이고 이유 또한 석연치 않다고 생각하지만 아무 말 못하고 그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원인이 최선을 다하지 못한 내게 있다는 자책감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내 혼란의 정도는 심해지기만 한다. 그와의 이별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생각 같아선 지금이라도 당장 찾아가 내 마음이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어야 할 것만 같다. 버선목 뒤집듯 내 속내를 다 드러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돌아선 그의 발길을 다시 되돌려놓을 수 있는 거라면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 나이에 웬 이별이며 가슴 아픔인지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그러나 현실 속의 나는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속절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이별이 너무나 싫은데 다른 한편에선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의 선택을 받아들여 존중할 수밖에 없다는...

포기하는 마음이 고개를 들지만 끝까지 기다리겠다고 마음을 곧추세워 본다.

내 인연이 여기에서 멈추고 만다면 내게 닥쳐올 이별의 아픔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지 두렵다.

인생 자체가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긴 하지만 이러한 과정들이 너무 쉽게 받아들여지는 풍토가 된 것 같다. 실제로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이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처리되는 등 몰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요즘 세태가 지나치게 가볍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런 모습들이 통상적으로 통용되는 사회의 본모습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런 풍토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나를 탓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없지 않다.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섬세한 나의 성정을 문제시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는 정말 새로운 만남 못지않게 기존의 인연에 대해 더 세심한 배려를 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니 만큼 더 이상 소중한 인연과의 이별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

PS: 무슨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유가족들의 아픔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길 빈다. 그리고 한 송이 꽃으로 산화해 버린 젊은 영혼들의 편안한 영면을 기원한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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