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과 신평리 박씨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6-02-21 19: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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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순(민주노동당 의원) {ILINK:1} 2월17일 정말 낯선 광경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주름이 깊게 패인 시커먼 얼굴의 농사꾼과 너무나 고운 피부에 세상의 근심은 모를 것 같은 여배우 전도연이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구호를 외치는 모습 말이다.
이 생경함과 어색함은 우리가 그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서로 너무나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앉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만화가들도 만들어내지 못하던 모습이었다.
이 사회를 강력히 지배하는 외세가 있는 한 이 나라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로울 수 없다고 머릿속으로 생각해왔지만 어제 ‘쌀과 영화’의 만남은 나에게도 참으로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신평리 박씨는 65살.
환갑을 벌써 넘긴 나이지만 열다섯 마지기 논농사를 짓는다. 열다섯 마지기에서 나는 소출이 나락 40kg 기준으로 187가마 정도 된다. 한가마 가격이 4만2000원. 일년에 790만원의 수입을 올린다.
물론 여기서 종자대와 비료대 농약값을 다 제하면 돈 벌고자 하는 일이라 할 수 없을 정도의 미미한 돈이 수중에 떨어진다.
박씨는 소를 네 마리 키운다. 들에 나가 풀을 뜯기기도 하고 마당 한켠에는 소 여물로 쓸 마른 풀을 잔뜩 쌓아놓기도 하였지만 사료를 먹이지 않을 수 없다. 사료를 먹이지 않으면 살이 오르질 않기 때문이다. 금을 넉넉히 받으려면 소가 건실해야 한다.
서울에 나가 사는 자식들이 명절에 내려와 힘들게 소를 뭐하러 키우냐고 타박하지만 그것이나마 없으면 박씨 내외는 돈한푼 쓸 수 없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소를 키워 무슨 떼돈을 버는 것도 아니다. 외양간을 비워둘 수 없어서, 농사꾼이 하는 일이 없이 빈둥거리면 무슨 큰 죄를 짓는 것 같아서 그냥 키운다.
농사짓는 것 외에는 달리 배운 기술도 없고 가진 재산도 없는 박씨지만 자신이 농사를 짓지 않고 땅을 놀리는 것은 천벌을 받을 일이라고 생각하며 미련스럽게 농사를 고집한다. 이나라 백성이 무슨 일이 있어도 입에 밥은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농사꾼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전도연.
어렸을 때부터 귀엽고 예쁘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고 여러 가지 고민과 갈등 끝에 영화예술계로 발을 들여 놓았다.
운도 따랐고 피나는 노력을 통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여기까지 오는데는 그가 가진 영화예술에 대한 병적인 애정이 없었으면 불가능하였다.
자신이 출연한 작품이 호평을 받을 때, 많은 사람이 보아주고 관심을 가질 때 그는 삶의 보람을 느꼈다. 자신의 연기에 대해 혹평하는 사람이 있으면 속상해하면서도 그 단점을 극복하고자 아마도 남몰래 무척 노력했으리라.
이제 영화계로 진출하는 후배들이 큰 우여곡절없이 대성하기를 바라며 이나마 자리잡은 한국 영화계가 더욱더 발전하기를 바라고 있다. 열악한 조건에 있는 스텝들과 무명배우들도 더 나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었으면 하면서도 당장에 그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마음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갖는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해서다. 그런데 돈보다도 직업 그자체에 미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일이 좋다는 것이다. 남이 보기엔 미련스러워 보여도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될 수 없기에 그 일을 고집해나간다. 어쩌다 생계 때문에 자신이 하고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할 때는 주변에서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하고 위로해준다.
영화쟁이들이 그런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전도연도 그러할 것이다. 그의 삶에서 영화를 빼면 그는 이미 전도연이 아니다.
영화자체에 대한 애정, 영화계 자체에 대한 애정이 아마 그의 배우생활의 가장 큰 동력일 것이다.
이제 여배우 전도연과 신평리 박씨는 한자리에 앉았다.
둘다 자신의 삶을 뿌리 채 흔들 수 있는 일이 예고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은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알고보니 같은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영혼의 양식을 만들고 하나는 육체의 양식을 만들었던 것이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아는 이땅의 천박한 인간들과 불가사리 외세는 대다수 국민들의 생존권을 아랑곳하지 않고 순수한 영혼들의 사명감과 진정성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돈벌이를 위해 모든 것을 파괴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둘이 한 자리에 앉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동안 그렇지 못했던 것이 이상하고 생경한 일이다.
이 둘만이 한 자리에 앉아서는 안된다. 불가사리 외세에 의해 생존권이 박탈당하고 자신의 삶의 가치가 파괴되는 이땅의 모든 사람들이 한 자리에 앉아야 한다.
노동자를 비롯하여 의사도, 교육자도, 조그만 공장을 하는 기업가도, 동네 구멍가게 사장님도 모두 한자리에 앉아야 한다. 우리들의 삶을 파괴하고 인생의 가치를 부정하는 세력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아무 상관 없었던 것처럼 보였던 신평리 박씨와 영화배우 전도연이 알고보니 한자리에 앉아야 하듯이 이 땅의 대다수 사람들은 한자리에 앉아야 한다.
‘쌀과 영화’에서 ‘쌀과 영화와 망치와 청진기와 분필과 새우깡…’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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