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 사회의 단상을 표현한 말로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법도를 무시한 정치인들이 차이를 부각시키고 갈등과 대립의 인위적인 정책을 쏟아 내면서 민족생존, 민주주의, 양극화 해소, 세계평화 등의 가면을 가지고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
가면을 벗고 본성을 보면 우리 사람은 자기 생존 욕구에 따라 자기 이익을 구하는 동물이다. 본성을 보면 나무 역시 그러하고, 새나 물고기 역시 그러하듯이 사람이 그러한 것은 자연스러운 생존의 모습이다.
우리 사람이 그러한 존재임을 아는 것이 삶의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언젠가 현학적 취미가 좀 있는 듯한 한 젊은이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자기 이익을 구하는 본성으로 사람을 정의하시는데, 인간을 곧 자연 상태의 인간으로 보시는 겁니까?” 굳이 아니라고 할 것도 없어 “그렇죠, 뭐”하고 간단히 대답하자 그 젊은이는 현학적 취미 생활을 하는 사람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며 질문을 던졌다.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가 자연 상태의 인간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표현한 것은 잘 아시죠? 홉스는 그러한 투쟁을 자연법으로 규제함으로써 사회적인 결합이 성립될 수 있다며 국가 계약설을 주장했는데, 선생님의 관점도 유사한 것입니까?”
지나치게 교과서적인 질문이라 흥미가 좀 떨어졌지만,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하는 질문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오만인지라 내 생각을 잠깐 말했다.
우선 이어받고 이어가야 할 우리의 사상과 문화가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릇처럼 서구식의 철학적 문법을 앞세워 말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든 그 유명한 말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서구식의 철학적 문법이 낳은 것이지만,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사람이 모두 자기 이익을 구하는 존재이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익을 두고 충돌과 갈등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을 두고 그러한 투쟁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다.
그러면 각자의 자기 이익들이 어떻게 공동체 속에서 어울릴 수 있을까? 핵심은 그것이다. 그 문제를 푸는 철학적인 전개는 철학자들이 하면 될 일이다.
나는 그 해답을 ‘시장’에서 찾는다. 각자의 자기 이익들이 시장의 원리에 따라 관계를 맺으면, 충돌과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공동체가 형성되고 운영될 수 있다.
사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이나 모두 자기 이익을 구하는데, 상품의 질과 값에 의해 거래가 좌우된다. 자기 이익만 내세워서는 거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어느 누가 자기 이익을 앞세워, 같은 값인데 질 나쁜 상품을 사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그에 따라 거래를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인간 공동체의 운영도 그런 시장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만 봐도 그렇다.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지만 편의상 임금만 놓고 보자.
임금 이외의 나머지 조건이 같다면, 노동자는 임금이 높기를 바랄 것이고 자본가는 임금이 낮기를 바랄 것이다. 양쪽 모두 자기 이익을 찾는 것이다.
그때 임금은 어떻게 정해질 수 있을까? 자기 이익만 내세운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노동력의 질과 값에 따라 거래가 이루어진다. 그 질과 값은 시장의 원리에 따라 정해질 수밖에 없다.
시장의 원리와 다른 방식을 찾으려고 인류는 많은 대가를 치렀지만, 공산주의의 몰락이라는 예에서 보듯 아직 그 확실한 대안을 찾지 못했다.
그것은 시장의 원리가 자기 이익을 구하는 존재인 사람에게 적합한 생존 방식이라는 반증이기도 한 것이다. 자기 이익을 구하는 본성을 가면으로 숨기고 그 어떤 대안을 찾겠다는 걸일까? 사람아, 가면을 벗고 시장에 가자.
그런데 그 시장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시장에서 각자가 갖고 있는 질과 값을 비롯한 여러 결정 요인으로 경쟁을 하다 보면 강한 자와 약한 자,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 현실을 정글의 법칙에만 맡겨두면 공동체는 파괴될 수 밖에 없다.
약한 자, 갖지 못한 자를 살려야 공동체가 산다. 살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사회보장제도이고 그것은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이다.
아무리 약하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기본적인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은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허기만 겨우 달래는 정도로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서구의 몇몇 선진국에서 볼 수 있는 사회보장의 수준을 떠올릴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국민들이 인간의 가치, 기본적인 삶의 수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허기만 겨우 달래도 된다는 수준이라면 그렇게 될 것이고, 치료비가 없어서 병을 고치지 못하는 사람은 없어야 하고, 학비가 없어서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는 수준이라면 또 그렇게 될 것이다.
건실한 사회보장제도를 갖추어야 약한 자가 살고, 강한 자가 살고, 시장이 살고, 나라가 산다. 한마디로 사람이 산다.
<위 글은 시민일보 3월 10일자 오피니언 5면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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