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을 매도하고 무능한 왕조를 탓할 수는 있지만 그들만의 죄는 아니다.
나라가 약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약하게 만든 건 왕조와 양반계급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그들을 비판하고 있다.
비판은 과거의 잘못을 따지는데 있기보다 앞으로 그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작업이다.
일제 36년이라고 하지만 을사늑약 이전에 이미 일본세력이 조선의 구석구석을 모두 점령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50년 또는 60년의 지배기간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 기나긴 세월 속에서 우국충정에 자결한 사람도 있고 왜놈들에게 붙어 백작 자작 후작으로 영달한 매국노들도 있다.
우리 민족의 자주민임과 조선의 독립국임을 만방에 선포한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33인 중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는 상당수 친일파로 변절했다.
광복 후 이들에 대한 응징으로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이 가동했으나 이승만의 태도 표변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노무현정권이 들어서면서 ‘과거사’ 청산문제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으나 광복 60주년도 훌쩍 넘어간 마당에 이렇게 흔들려도 되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다.
친일파에 대한 응징은 시효가 없어야 되겠지만 4.19나 5.18의 책임추궁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주제에 거슬러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이런 판국에 공교롭게도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의 친일행위가 담긴 동영상이 발견되어 국민들을 어리벙벙하게 만들고 있다.
안익태는 애국가뿐만 아니라 ‘한국 환상곡’등 오케스트라를 위한 굵직굵직한 작품을 많이 남긴 사람이다.
그가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창립 10주년 기념음악회를 지휘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게 1942년이다. 왜놈들이 말하는 태평양전쟁이 막 시작했을 때다.
일제는 이 전쟁에 조선과 중국 등에서 많은 사람을 징발시켰다. 군인으로 끌어가고 노무자로 데려갔으며 정신대란 이름으로 군대 위안부를 삼았다.
모든 쇠붙이는 전쟁물자로 가져갔다. 밥그릇이나 숟가락은 말할 나위도 없고 요강과 신주 모시는 촛대까지 뺏어갔다.
자원이 부족한 일제가 독일 이태리와 추축국을 형성하고 세계를 향하여 전쟁을 벌였으니 남아날 것이 있었겠는가.
심지어 국어말살은 물론이고 이름과 성도 바꿔야 했다. 이른바 창씨개명이다.
지금도 일본의 우익들은 조선 사람들이 스스로 원해서 창씨개명을 한 것이지 일본이 강요한 일이 없다고 강변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꼴이다.
이 와중에 많은 민족 지사들이 변절을 강요당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교수들에게는 학생들에게 학병을 권유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영화인들은 일본군이 이기는 영화만을 제작하게 만들었다.
문인들은 천황폐하를 칭송하고 가미가제를 영웅화시키는 격정적인 글을 쓰게 했으며 화가들은 ‘황군’의 승리만을 그리게 했다.
가수와 작곡가도 똑같은 일이 되풀이 되었다.
모든 예술분야의 유명한 인사들이 일제의 마지막 발악에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간 사람이 많다고 생각된다.
이번에 발견된 안익태의 행태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물론 독일이나 불란서에서는 훼절을 강요받은 예술인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저항한 사람도 있다.
우리 예술인 중에 그러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모두 매도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렀다.
광복직후 같았으면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60갑자를 넘긴 이제 와서 그들을 징치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행적은 감춰지기도 하고 찾아내지 못한 것도 많아 예술적인 가치만이 기득권 형태로 남아버렸다.
가곡 ‘선구자’를 작곡한 조두남 역시 친일행적이 드러나 한 때 ‘선구자 부르지 않기 운동’이 전개된 일도 있다. 홍난파도 마찬가지다.
이들에 대해서 치열하게 공격한다면 안익태의 애국가도 모든 국민의례에서 빠져야 할 판이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이런 식이라면 3.1절 식장에서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서를 빼야하고 춘원이 쓴 소설은 모두 폐기해야 한다.
친일화가로 알려진 이당(以堂) 김은호나 운보(雲甫) 김기창의 작품은 불사라야 되지 않겠는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이 문제로 강경 일변도를 고집하기는 쉽다. 앞뒤를 살피지 않는 사람은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면서 합리적 사고를 살려야 한다.
막무가내는 갈등과 손해만 키울 뿐이다. 먼 미래를 내다보며 슬기로운 판단을 내리도록 하자.
<위 글은 시민일보 3월 14일자 오피니언 5면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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