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아버님께 저의 인사를 꼭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로부터 벌써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아버님! 어쩌면 제 자신이 차마 아버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심정으로 살 수 밖에 없었기에 진즉부터 올해 어버이날에는 더이상 미루지 않고 묻어오던 제 마음을 한번은 꼭 글월로 올려야 하겠다며 별러 왔었습니다. 그런데 어제가 다시 찾아온 어버이 날이었건만 저는 하루 종일 서성이는 마음으로 도저히 글월을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1977년 11월23일 아니면 24일이었을 거예요. 박정희 유신독재를 반대하다가 두번째 구속이 되어 전남 목포 교도소에 수감이 되었고, 저로서는 3년 정도 감옥살이를 힘겹게 치르고 있던 때였습니다. 어찌나 겨울이면 추위가 매섭던지 서서히 동상 걱정을 하며 겨울을 대비하던 그날도 몹시나 감방은 추웠던 한겨울 같던 초겨울이었습니다.
공무원 근무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던 그러한 시각이었으니 저같은 재소자들의 면회시간은 끝난 지가 더욱 지난 시각이었었지요. 컴컴한 어둠이 세상을 온통 검은 세상으로 몰아 넣어가던 그러한 늦은 시각, 담당 교도관이 저의 굳게 닫힌 독방의 감방문을 갑자기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교도관을 따라 보안과에 도착했었습니다. 초저녁 어둑발이 시작된지도 한참인데 거기에 둘째 여동생 숙자가 혼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어요. 제가 “아니,어찌된 일이냐?”고 묻게 되었지요. 동생 숙자는 아버님께서 위독하다고 말하면서 “지금이라도 각서 한장 써주고 나갈 수 없는거야?”하였습니다. 아버님께서 저의 거듭된 구속으로 인하여 홧병을 얻으셨음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짧은 시간에 위독해 지신지를 저는 모르고 감옥에 그저 매어 있었습니다. 숙자 동생에게 이렇게 타이르고 그날 저녁 감옥에서 서러운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며 짧은 면회를 마치고 작별을 하였답니다. “숙자야! 각서는 아무 때나 쓰는 게 아니고 처음 나를 구속할 때 각서를 쓰면 구속하지 않겠다고 하였던 것이고 그것을 거부 하였기에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것이란다.” 동생은 그길로 아버님이 계시는 전주로 떠났습니다.
그해 12월, 달이 바뀌어 다시 한해의 마지막 달이 돌아왔었습니다. 주로 한달에 한번씩 면회가 엄격하게 제한되던 시기였습니다. 어머님께서 먼길 야간 완행열차를 타시고 매달 면회를 다니셨지요. 8년간을 그렇게 고생을 하셨으니까요. 1977년 마지막 면회를 하던 날이었습니다. 희미하게 가려진 플라스틱 이중 칸막이 사이로 여느달과 마찬가지로 3분정도 면회를 하였습니다. 당연히 저는 바쁜 마음으로 아버님의 병환을 여쭈었지요. 어머님께서는 그때 감옥에 갇힌 자식 마음에 슬픔을 보태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지금도 저는 그 당시의 어머님 말씀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걱정 너무하지 말고 네몸이나 늘 잘 간수 하여라. 아버님은 그냥 우선하시단다.” 그러셨어요. 그날도 저는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아버님의 쾌유하시기만을 기원하며 어머님의 돌아서시는 무거운 발걸음에 평안하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1977년이 저물어갔었지요. 세상은 박정희 유신독재가 꺾이기는 커녕 무시무시한 영구 집권 프로그램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산천초목도 박정희 시퍼런 서슬에 숨죽이며 연명하던 참으로 암담한 그러한 시절이 계속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양심적인 교수, 정치인, 종교인, 학생, 노동자, 농민 할 것 없이 박정희를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은 모조리 감옥에 갇히우던 그러한 무지막지한 독재시대가 태연하게 흐르던 그러한 시절이었습니다.
묵은 해는 지나고 1978년, 새로울 것 없는 새해가 돌아왔었지요. 오랜만에 생존해 계시던 할머님과 직장 일로 오지 못하던 바로 아래 순례가 저를 찾아 왔던 달입니다.
언제나처럼 먼저 병환에 계시는 소식을 여쭐 수 밖에요. 그래서 그날도 할머님의 문안인사를 올린 뒤 아버님 병환을 순례한테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물정모르고 아버님 병세 걱정을 아직도 하고 있는 오빠를 보노라니 너무도 억장이 무너졌던지 모처럼 찾아온 여동생이 참았던 피눈물을 그냥 토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빠, 아버지 작년 11월25일날 돌아가셨어! 살아계시는 동안 오빠 걱정만 그토록 하시다가 뜬눈으로 오빠얘기를 하시다가 그렇게 돌아가셨어.”
할머님도 다시 저 때문에 통곡을 하셨답니다. 손녀 손에 이끌리시며 저를 거듭 돌아보시며 그렇게 작별하셨던 할머님도 아버님 찾아 떠나신지 오래된 오늘까지 저는, 솟아오르는 깊은 슬픔도 언제나 죄스러움으로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올해 어버이날도 다 지나버린 오늘 겨우 절절한 불효자의 더는 미룰 수 없는 마음을 이렇게 아버님 전에 어렵게 올리나이다.
평생 농부로 사시면서 우리 여덟 남매 기르시기에 고생만 하시다가 감옥에 저를 보내시고 그렇게 떠나신 아버님을 생각하며 오늘은 웬지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잊을 수없는 사랑하는 아버님께 감옥에서 석방된 아들이 아직도 석방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서성이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으니 이 늦은 밤에 애달픈 마음만을 간직하며 어찌하지 못하는 글월을 여기에서 맺으려 하옵니다.
오늘 따라 이토록 사무치게 뵙고 싶은 아버님! 불효자식 용서하시고 평안히 평안히 영면하시기만을 빌고 비옵나이다.
<위 글은 시민일보 5월 10일자 오피니언 5면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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