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활인의 커밍아웃에 감동합니다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6-05-10 17:14:41
  • 카카오톡 보내기
  • -
  • +
  • 인쇄
이인영 열린우리당 의원 {ILINK:1}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각 후보들의 선거전략을 평가하면서 ‘이미지 정치’란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이미지 정치란 표현이 등장한 적은 오래 되었지만 이번처럼 본격화된 적도 드문 것 같습니다. 대체로 부정적 함축이 있고 그래서 곰곰히 따져 보며 몇 자 적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미지 정치와 감성정치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얼마나 다른지 잘 모르겠고 혹 같을 지도 모르겠지만, 부정적인 것이 이미지 정치라면 감성정치는 긍정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게제합니다. 한 말 더 거들면 ‘제대로 된 감성정치를 하자’, 뭐 이런 취지입니다.

▲과거의 생활인, 현재의 생활인

2002년의 생활인들은 한 마디로 열심히 살지만 자기 사치와 인락을 절제하며 동시에 변화와 개혁을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역사의식, 사명감을 터뜨리고자 했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그 시대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이 참여의 매개였고 수단이며 무기였습니다.

그런데 2006년 지금은 좀 달라진 것 같습니다. 지금의 생활인은 좀 즐기면서 가치추구를 하고, 즐김과 가치추구의 어느 하나를 극단적으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생활인들이 자신을 절제하며 가치추구를 했다면, 혹 미래의 생활인들이 가치를 버리고 안주할 것 같은 것에 비하면, 양자를 동시에 추구하는 현재의 생활인들은 이들과 차이를 갖고 있다 하겠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키우며, 다른 한편 훨씬 더 사회적 본질일 수 있는 기득권을 정신적 차원에서 또 물질적 차원에서 그리고 사회적 지위의 측면에서 형성하고 있기에 그리된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전제는 즐기는 것과 안주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생활인들은 대개 인터넷을 넘어 각종 레포츠나 문화아이콘 등을 통해 다종다양한 커뮤니티를 즐기고 활동합니다. 그러기에 이들의 재결집은 단순히 인터넷을 통한 정치적 폭발로만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즉 이전에는 인터넷만 있으면 되었고 단순히 인터넷이 참여의 매개였던 반면, 지금은 매니아와 문화아이콘 등의 성층화 없이 단순한 2002년의 기적을 재현하는 것은 부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당시의 386이 현재의 486이 되는 과정과도 관련있으며 이들의 사회적 속성이 본질과 무관하게 흐르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486 또는 현재의 생활인들은 성공한 사람을 동경하고 갈채를 보내지만, 동시에 ‘혼자 행복한 것 같아 죄송했어요’라는 고백과 이로부터의 새로운 감동을 받지 못하면 지도자, 오피니언 리더와 손을 잡지 않습니다.

그냥 낮은 곳에 임하고 겸손한 자세를 취하며 말 그대로 이벤트와 이미지로 흘러서는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유권자로서의 의식이 그 정도 수준을 넘었고, 진실한 감동이 없으면 몸이 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벤트 면역, 이미지 감동 최저화의 감가상각 상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식인을 위한 새로운 변명, 신중산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자신을 절제하며 역사의식을 위해 궐기하던, 말하자면 정치투쟁 시대의 지성은 이제 단순한 무한대의 감동으로, 도덕성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물론 저는 이것을 고집하기도 하지만요). 이제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이룬 것을 나누고 공유할 줄 아는 새로운 감동이 파고 듭니다.

이를 테면 자기가 이룬 것을 나누는 철학의 실행은 무엇일까요? 주지하다시피 삶의 궤적, 현실을 진단하고 대처하는 진정성의 차별은 언제나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것을 투시하는 눈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강금실과 오세훈의 차이는 어쩌면 차별입니다.

최근 신중산층-계급계층적으로 쁘티부르조아라고 할 수 있는 편에 가까운-의 새로운 사회적 책무에 관한 논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예컨데 보육과 청소년 문제에 대처해서 ‘입양할 수 있는가?, 수양아들 수양 딸로라도 보살필 수 있는가? 아니면 소년·소녀 가장과 자매결연이라도 하고 있는가?’, 노인과 노후문제를 위해 ‘공양할 수 있는가?, 수양아들 수양 딸 노릇을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독거노인과 자매결연이라도 하고 있는가?’, 글로벌 지성을 위해 ‘단 돈 1만원이라도 매 달 피지나 이디오피아 같은 곳에 지원하고 있는가?’, 사회적 기부와 공헌을 위해 살아서 뿐만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나누고 공헌하기 위해 ‘유산 기부, 장기 기증, 시신 기증 등에 얼마나 참여하고 있는가?’ 등등을 논의한 적이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에게는 부끄러움 뿐입니다. 사회적 기부, 재화의 기부에 얼마나 인색했는지, 도시락 배달은 해 봤는지, 독거노인을 목욕시켜 본 적이 있는지 등 참 많았습니다.

저는 느닷없이 던지는 제 친구들의 토해냄이 제가 가진 정치투쟁의 도덕성 고결성의 연장 못지 않게 훌륭하며 진정한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터져서 정치혁명으로 몰고올 제2의 감동을 예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패러다임 시프트의 토대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이러한 사고의 접근이 맞다면 이런 것에 기반한 정치가 감성정치일 것 같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닌 고작 30분 정도 사진 찍고 마는 그런 정치와 365일의 삶이 그렇게 되어있는 진실한 정치는 다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삶의 진정성을 깔고 있기에 다소 가식적인 이미지 정치와는 사람도 다르고 본질도 다를 것입니다. 기대됩니다.

<위 글은 시민일보 5월 11일자 오피니언 5면에 게재됩니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시민일보 시민일보

기자의 인기기사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