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방미인 아버지의 꿈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6-10-24 17: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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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맹형규 의원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에 묵직한 돌을 얹은 듯 편치 않다. 이 땅의 아들들이 갖는 아버지에 대한 감정과 다를 바 없다. 어머니라는 단어를 들을 때 밀려드는 파장과는 사뭇 다른 무게감. 뭐랄까, 연민이라고 표현하면 적당할까. 당신만의 꿈과 희망이 있어도, 위로는 보수적인 데다 엄격한 윗세대에 눌리고 아래로는 거느린 식솔에 치받쳐 마음껏 제 뜻을 펼쳐 보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이들이 우리네 아버지요 그 세대다.

내 아버지는 예술가의 기질을 다분히 갖춘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분이었다. 예술가 기질을 가진 분답게 심성도 여리고 착했다. 지금의 경기고등학교인 경성제일고보를 다니셨는데, 요즘도 가끔씩 당시의 동기이자 단짝이었던 민관식씨 얘기를 꺼내신다. 민관식씨는 5선 국회의원을 지낸 분으로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문교부장관, 5공화국 직전 최규하 대통령 시절에 국회의장 직무대행을 지냈고, 최장수 대한체육회장으로 한국 스포츠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분이다.

“키는 작달막하지만 몸집은 아주 다부진 친구인데 못하는 운동이 없어. 개성이 집이어서 매일 경성까지 기차로 등하교를 했는데 주먹맛도 만만치 않아서 기찻간 일본 애들에게 시비도 걸고 혼내 주기도 했지, 아마. 그것 때문인가 일년 유급을 하고는 그 뒤로 서울서 하숙을 하며 학교에 다녔을 거야. 나와는 틈만 나면 함께 테니스를 치는 파트너였다고.”

경기고 출신이니까 공부도 곧잘 했을 아버지의 꿈은 화가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화가를 환쟁이라 부르며 비하하던 시절이어서 엄한 할아버지께서 허락할 리 만무했다. 당대의 내로라 하는 예술가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며 사랑 손님으로 들이던 할아버지도 막상 당신 자식이 환쟁이라 불리는 화가가 되는 건 허락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할아버지의 속내는 당신 아들이 농사나 짓고 조상들 모신 선산이나 돌보면서 조용히 살기를 원하셨다. 그것이 집안의 장손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그런 분이었다. 화가와 농사꾼이라는 서로 다른 두 단어가 주는 어감의 차이만큼이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꺾인 꿈에 대한 반항 때문이었던지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2년이나 유급한 끝에 졸업했다. 그리고 기계전문학교를 마친 뒤 사회생활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남들처럼 직장을 잡고 월급쟁이 노릇도 했지만, 자유롭게 살고 싶은 아버지가 견뎌 내기에는 좀 버거웠던 모양이었던지 곧 그만두고는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도 아버지의 체질과 맞아떨어지는 일은 아니었지만 가끔은 성공도 하고 가끔은 실패도 하면서 그런대로 꾸려 나갔다.

군납에도 손을 대셨는데 일이 잘 풀렸던지 꽤나 크게 하셨던 기억이 나고, 그 후엔 무교동에 사무실을 내고 새로운 간판을 내붙였다.

내가 중학교 1학년이던 해, 일들이 틀어지기 시작하더니 급작스레 무너졌다. 시쳇말로 쫄딱 망한 것이다. 사업이란 게 본래 부침이 있는 것이니만큼 웬만하면 다시 새로 시작하셨을 법도 하련만 아버지는 나만 할아버지 댁에 남기고는 그 길로 고향인 양평으로 내려가셨다. 더 이상 일어설 힘이 없기도 했겠지만 사업이 당신 체질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애초 할아버지의 뜻대로 땅이나 파고 선산이나 지키는 삶으로 되돌아가신 셈이다.

“뭐하려고 그렇게 오장육부를 아프게 하면서 사냐?”

4년마다 선거를 치르느라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복잡한 일로 골머리를 앓는 모습을 보여도 마찬가지다. 속 끓이지 말고 제 편한 대로 사는 게 제일이라는 말씀에서 아버지의 유유자적한 여유를 본다. 내게 없는 바로 그 여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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