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데모가 벌어질라치면 우리 정외과, 그것도 1학년들은 맨 앞줄에 서야 했다. 누군가 나를 통제하고 억압하면 그게 아무리 지엄한 할아버지라도 달려들던 나로서는 참기 힘들게 괴로웠다. 그러나 의식적이지는 않았지만 친구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는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지금이야 신촌 거리가 호화찬란한 유흥가로 변했지만 당시만 해도 간판 제대로 걸고 번듯하게 장사를 하는 집들이 드물었다. 우리가 주로 찾는 술집은 시장 골목에 있었다. 간판도 없고 탁자 몇 개만 놓고 막걸리에 두부나 김치 쪼가리 정도를 안주로 내주던 집이었다. 할머니 혼자서 반찬값이나 할 요량으로 운영하는 집이니 그 옹색함이 말할 수 없지만 얄팍한 주머니로 양껏 마실 수 있는 곳으로 거기만한 곳도 없었다. 아니 그마저도 없으면 학생증이나 시계를 풀어 맡기기도 하고 여차 하면 외상도 할 수 있었으니 가난한 학생들이 모여 시대의 아픔을 개탄하며 개똥철학을 곁들인 나름의 호연지기를 설파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돈이 필요한 학생들은 과외를 하면 되었다. 내 주변에도 과외를 해서 용돈을 벌어 쓰거나 학비를 충당하는 친구들이 제법 되었다. 하지만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도 언제나 동전 몇 닢이 고작일 뿐 먼지만 폴폴 날리며 살았어도 과외를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친구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배포를 자랑하는 시간을 더 좋아했고, 금쪽같은 데이트 시간을 줄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나 마셔 댔던지 목을 자른 군화를 신고 다녔는데 마시다가 흘린 막걸리로 까맣던 군화가 허옇게 변할 지경이었다. 이런 모양 때문이었던지 친구들은 나를 ‘신촌 백구두’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수업은 빼먹기 일쑤여서 강의실보다 막걸리 집에 더 자주 출몰하는 나였지만 선배들의 눈에 들었는지 장래성이 엿보이는 학생을 선배들이 뽑아 만든 여정클럽의 멤버가 되었다. 딱히 하는 일도 없이 일주일에 한 번씩 종로에 있던 다방 ‘여정’에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가끔씩은 취직한 선배를 벗겨 먹기도 하는 모임이었다.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도 되고, 안 가도 나오라는 소리를 하지 않는 게 이 모임의 특징인데 바로 이런 성향이 내 성격과 꼭 맞아떨어져서 데이트와 술 다음으로 몰두할 수 있었다. 대학 생활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내가 그나마 마음을 붙이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셋의 힘이다.
“어이, 맹형규. 다음 번 학생회장에 나갈 준비를 해라.”
2학년 가을쯤 되었을까. 내게 선배 몇몇이 뜻밖의 지시를 해왔다. 아마 입학 성적도 좋고 몰려다니는 친구도 많고 하니 그만하면 학생회장감으로 나쁘지 않다고 선배들이 판단을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선배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닥을 기는 내 학점이었다. 학생회장이 되려면 평균 B학점을 넘어야 한다는 교칙이 있었는데 그때까지 내 학점으로는 턱도 없이 모자랐다. 한 번 남아 있는 기말고사를 아무리 잘 치른다고 해도 B학점이 될 둥 말 둥이었다.
갈등 끝에 선택한 것이 군대였다. 선배들에게는 차마 낯이 서지 않는 일이었지만 나는 2학년을 마치자마자 입대를 자원하고 그 길로 군대에 갔다. 이로써 내 대학 시절의 전반부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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