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발견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6-11-13 20: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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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맹형규 의원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오붓하게 같이 보낼 시간도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외국과 한국을 오가며 살아야 하는 직업을 가진 탓에 나는 늘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월급 봉투 한 번 제대로 준 적이 없는데도 아쉬운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정말 악착같이 가정을 지켜 준 아내는 물론이고, 한창 예민할 시기에 런던으로 워싱턴으로 학교를 옮겨 다녀야 했던 두 딸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굴뚝이다.

그 시절 통신사 기자는 마감 시간도 없고 출퇴근 시간도 따로 없어서 새벽에 출근했다가 다음날 새벽에 퇴근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도 많아서 아이들 얼굴을 보는 것은커녕 기억도 못할 정도로 바빴다. 겨우 자는 모습 정도만 보는 것도 다행이었다. 아이들은 지금도 가끔씩 그때 얘기를 꺼낸다. “그때 아빠 얼굴이 생각이 잘 안 나”라고.

연합통신 런던 특파원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가 1984년이었는데, 큰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작은아이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초대 특파원이라서 집도 없었고 사무실도 없었다. 임시로 모텔쯤 되는 곳을 구해서 살림살이를 풀었는데 런던의 날씨가 어찌나 을씨년스러운지 밤이면 커튼을 뜯어서 덮고 자야만 했다.

지국 설립하랴 도착하자마자 터진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결혼 소식을 취재하랴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냈다. 인터넷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이고 워드 프로세서조차 없어서 텔레타이프로 기사를 쓰고 로히터 통신사에 가서 한 자 한 자 찍어야 비로소 기사를 보낼 수 있었는데, 어찌나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던지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은 살림살이할 집은 구했지만 사무실이 없어 집이 곧 사무실이요 사무실이 곧 집이기도 했다. 바쁘고 고생스러운 것이야 서울이나 매일반이었지만 달라진 것은 가족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이었다. 방긋거리며 달려드는 아이들을 품어 안아 줄 수 있었고, 틈이 나면 동네를 함께 산책할 수도 있었다. 늘 자는 얼굴만 보던 아이들과 이렇게라도 어울리면서 그제야 ‘나도 가족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의 발견이랄까. 런던 생활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나야 일 때문에 고생을 한다지만 아이들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고 진땀을 뺐다. 처음에는 말도 통하지 않는 데다 외모도 달라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 때문에 저 고생을 하는구나 싶어서 고통스럽기도 했다.

‘차이니스’라는 놀림 때문에 싸움을 하고 들어온 날은 당장이라도 보따리를 싸들고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 생활도 즐거워하고 친구도 사귀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런던 생활은 3년으로 끝났다. 런던에 제법 적응을 하는구나 싶을 즈음에 아이들은 또다시 서울에 맞춰 사는 연습을 해야 했다. 새로운 서울살이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학교 공부였다. 과목도 다르고 배우는 방식도 달랐다.
귀국을 해서 첫 번째 본 시험에서 큰아이는 꼴찌에서 두 번째 성적을 받아왔다. 성적표를 받아든 우리 내외는 하도 기가 막혀서 입을 다물지 못했는데 정작 본인이 받은 충격도 적잖았던 모양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상머리에 앉아 떠날 줄 몰랐고 심지어는 코피를 쏟기도 했다. 그런 아이를 보는 내외의 마음도 쓰렸다.

“아빠, 힘내세요!”

직장을 옮기는 문제로 긴 고민에 빠져 있을 때에도, 정치라는 낯선 마당으로 판을 옮길 때에도 늘 웃는 얼굴로 내 코앞에 바짝 불끈 쥔 주먹을 들이밀며 아이들이 건네주던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불끈 쥐어 보인 아이들의 주먹에 그저 씩 웃어 주었을 뿐 고마운 표시 한번 못했는데, 이참에 팔불출 같지만 화답을 해야겠다.

“얘들아,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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