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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일보]세월이 갈수록 그리움의 폭이 자꾸만 커지는 사람이 있다.
생의 경계 너머로 떠나간 지 십 수 년이건만 여전히 산자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어떤 수식어로도 그가 남긴 삶의 궤적을 다 풀어낼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있다.
빈자의 아버지로 자신의 전부를 바친 제정구 선생이 바로 그다.
그런데 고인이 추구하던 삶의 철학이 행정 일선에 접목돼 민들레 홀씨처럼 퍼지고 있다.
김윤식 경기 시흥 시장을 통해서다.
김 시장은 고인의 비서출신으로 지난 6.2 지방선거 당시에는 ‘제정구 선생의 정신을 시흥에 완성시킬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6.10항쟁을 주도했던 전적 때문에 선생의 이름이 회자되던 지난 10일, 김 시장을 찾았다.
김 시장은 <시민일보>와의 인터뷰 서두에서 제정구 전 의원을 거론했다.
그는 “오늘이 6월 10일이다. 6월 항쟁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 지금 민주주의는 어디까지 왔는지, 지방자치는 어디까지 왔는지도 생각해보게 하는 그런 날이다. 그런 얘기를 오늘 확대간부회의에서도 했다. 간부회의 들어가기 전에는 아침 일찍 미래도시 개발사업단 단장과 계장급까지 들어오라고 해서 몇 가지 주문을 했다. 그 중 하나가 제정구 선생님 얘기였다”고 서두를 꺼냈다.
김 시장은 “제정구 선생님이 빈민운동의 대부로 일컬어지고 막사이사이상까지 수상하셨던 핵심적인 이유가 그들의 편에 서서 평생을 사셨을 뿐 아니라,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강제철거 되는 경제적 약자들, 빈민들, 이 사람들과 함께 최초로 집단이주를 해서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정착했다는 것”이라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시흥시 신천동에 있는 보금자리 마을이다. 그게 재개발 사업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사업단에 제정구 선생님 얘기를 꺼낸 건 보금자리 마을은 한국현대사 뿐 아니라, 세계 빈민운동 역사에서 굉장히 큰 성과물로 상징성이 크고, 철거민들이 집단이주를 해서 그 속에서 수없이 많은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면서 유지돼 온 마을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시장에 당선되기 전에 재개발 사업을 하면서 그 옆에 만들어지는 소공원 안에 보금자리 마을이 만들어진 역사, 풍경,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 흔적이라도 남겨두려고, 했는데 안 됐다”며 “의원님이 돌아가시고 마을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만들었던 추모비조차도 제자리에 못 갖다 놓게 했다”고 당시의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김 시장은 “도시재생사업이나, 오래된 도시를 재개발 하긴 해야겠지만, 과거 역사, 삶의 흔적을 싹 쓸어 내버리고 새것을 짓는 방식, 이게 과연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도시의 재생인지, 아니면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건지, 이런 걸 생각안할 수 없다”며 “우리시는 뉴타운 사업 2건, 주거환경정비사업 7건을 추진하고 있다. 총 9건의 재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를 그런 원래 살던 사람들이 최대한 많이 다시 재정착하게 하고 최초의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부터 그 마을 사람들의 눈높이와 이해와 요구에 충실하도록 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 김 시장 스스로 재개발 관련 연구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지역주민들로 구성된 재개발 관련 모임을 만들고, 그들을 위원으로 위촉한 데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다.
김 시장은 “지금의 뉴타운도 이 지경에 이른 것이 출발부터가 도시 재생사업에 대한 철학의 부재 탓 아니겠냐”며 “뭘 해야 된다는 강박에 쫓겨서 성과는 낼 수 있지만, 그 성과물이 누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냐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 아니냐, 그러니까 주민들의 반대도 생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김 시장은 ‘시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행정시민참여 실천’을 강조했다.
그는 “공동체성의 회복, 시민참여를 강조하는 건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다. 그렇지만 너나없이 시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행정시민참여를 얘기하면서도 여전히 행정과 시민은 상당부분이 갑과 을의 관계이고, 요구하는 자와 요구받는 자의 관계”라면서 “진정한 시민참여, 진정으로 시민이 주인 되게 하는 것, 이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복원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상호 존중과 배려에 기초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시흥시가 ‘공동체성의 회복’, ‘미래를 키우는 생명도시’라고 시정구호를 정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김 시장의 이런 뜻은 단순히 구호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시정에 직접 반영되고 있다.
일례로 관내 경로당에 월 25만원씩 지원하는 사업이 있다. 하지만 공짜가 아니다.
공동체성 회복을 위해 어르신들이 그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는 게 김 시장의 지론이다.
그는 “어르신들에게 사업계획서를 내라고 할 수 없다. 우리시가 노인정에 제안하기를 ‘동네에서 어른 노릇을 해 달라, 거기에 필요한 돈을 드리겠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르신들이 ‘노인정에 돈 두배로 올려준다고 공약했는데 왜 안주냐’고 항의했다. 그래서 ‘그냥 드리겠다고 한 것 아니다. 어르신들이 어르신 역할을 해주실 때 거기에 필요한 사업비를 드리겠다’는 뜻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랬더니 ‘노인들 부려 먹으려고 하느냐’고 화를 내셨다. 그래서 ‘그게 아니라 뒷방 문화에 물러서 계시지 마시고, 나서서 어른 역할 해 주십시오’ 하고 부탁드렸다. 노인문제 전문가들과 같이 노인정에 찾아가서 어르신들과 무척 많은 대화를 했다”며 “그랬더니 어르신들이 ‘아, 우리가 나이 먹었다고 노인정에 앉아서 고스톱만 치고 있었구나’ 하고 스스로 자각을 하시는 것 같았다. 그럴 때, ‘이러지 말아야지’ 하는 의지가 생길 때 변화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몇몇 노인정은, 줄려면 그냥 주지 치사하게 우리는 그렇게 안 해 이러는 곳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취지가 바르게 전달돼 ‘동네에서 우리가 어른 역할을 하자’고 하는 노인정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김 시장은 “관내에 노인정이 247개 정도 되는데, 하반기에 어르신들의 토론 결과를 콘테스트를 할 계획”이라며 “가장 좋은 30곳을 선정해 사업비와 필요한 비용을 다 드릴 것이다. 기준을 2000만원으로 잡고 금액에 맞춰 궁리를 해주십시오 하고 어르신들게 부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재미있게 지내는 노인정으로, 동네에서 어른 역할하는 게 눈에 보이면 다른 곳도 당연히 따라온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김 시장은 “제가 공동체를 얘기할 때 항상 그렇게 얘기한다. 공동체 복잡한 거 아니다. 우물가, 빨래터, 밥상머리 이거였다. 옛날 교육은 마을이 아이를 키웠다. 이게 공동체다. 빨래터에서 자식자랑하고 남편 흉보고, 고부간의 갈등 토해내면서 스트레스 풀고, 이런 게 공동체였다. 동네 큰일 생기면 회의하고, 좋은 일 생기면 잔치하고, 이런 게 공동체”라면서 “도시화 되면서 물리적 환경이 달라지다 보니까 지금의 사람의 의식이나 사람관계도 단절되고 고립화 됐지만, 우리 행정이 같은 일을 하더라도 관점을 조금 달리해서 재구조화 하고 다른 관점으로 풀어 가면 다양한 공동체가 살아 숨 쉬는 도시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영란 기자 joy@siminilbo.co.kr
인물 스케치
확실히 김윤식 시흥시장의 시정운영 철학은 남 다른 데가 있다는 생각이다.
재정이나 제도적인 측면에서 부딪히기 일쑤인 지방자치의 현실적 한계에 대한 김 시장의 관점은 확실히 달랐다. 효율적이고 전략적인 접근 방식을 쓰고 있다.
예를 들어 공공 도서관만 해도 관 주도가 아닌, 시민 자원 활용 등의 민간이 주도하는 방식인데 기존의 아웃소싱과는 확연히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사서 자격증을 보유한 전문가 그룹부터 도서관 정책의 고수들이나 작은 도서관 운동을 해본 경험자, 전문성이 없어도 도서관의 중요성에 공감하는 엄마들에 이르기까지 이분들을 훈련하고 조직화 시켜서 도서관 운영의 주체로 나서게 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도서관을 시민들에게 통째로 드려서 직접 운영하도록 하는 것이다.
현재 이 방식이 적용된 신천 도서관의 경우, 계약을 끝내고 ‘도서관 희망씨’라는 이름으로 100% 시민자원 활동가들이 주체가 되어 운영을 시작한 상태다.
공무원 조직의 회의문화 변화에서도 김 시장이 추구하는 시정운영 철학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시흥시 공무원 사회에서는 기존의 1인 보고 체계의 회의 방식이 사라진지 오래다. 시장의 질문으로 개인의견이 활발하게 전개되거나 간부들끼리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등 회의 패턴이 많이 바뀌었다.
아직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조직 문화가 달라지고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는 김 시장이 쓰는 비책이 또 있다.
‘솔직 토크’라는 제도인데 ‘아무 격식 없이 서로 술잔을 나누면서 별도의 방에 둘러앉아 하는 회의 방식인데 시작 시간은 있지만 종료시간도 없고 기록도 없다. 때로는 전문가를 초빙해서 기조발제를 듣고 그에 대한 상호 토론을 진행하기도 한다는 전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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