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박근혜를 막으려면

공희준 / / 기사승인 : 2016-11-07 15: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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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희준 정치컨설턴트
▲ 공희준 정치컨설턴트
「아크 엔젤」은 「당신들의 조국」으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기자 출신의 영국 작가 로버트 해리스가 사회주의 체제 몰락 직후의 혼란스러운 러시아를 배경으로 삼아 쓴 소설이다. 참고로 「당신들의 조국」은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다고 가정하고서 그 이후에 벌어졌을 법한 사건들을 묘사한 대체역사(Alternative History) 소설의 걸작이다.

「아크 엔젤」의 기본 줄거리는 스탈린이 인생 말미에 몰래 낳은 아들을 수십 년 동안 은밀히 양육․관리해온 강경 공산주의자들이, 옐친 정권에 대한 민중의 반감이 극심해진 정세를 틈타 독재자의 2세를 간판으로 앞세운 러시아판 ‘로마 진군’을 꾀한다는 이야기이다. 국내에 번역돼 나온 지가 거의 10년 가까이 지난 책인 터라 개략적 줄거리를 공개해도 출판사 측에서 항의하지는 않을 것 같기에 스포일러의 위험성을 무릅쓰고 소개해봤다.

내가 「아크 엔젤」을 읽었을 시점은 2010년 가을 경으로 기억된다. 이때는 이명박과의 세종시 싸움에서 이긴 박근혜가 대권고지의 9부 능선에 도달한 무렵이었다. 옐친의 무능함과 성급한 시장주의 개혁의 부작용이 스탈린의 공산독재를 그리워하는 그릇된 향수를 대중들 사이에 확산시킨 것처럼, 국가를 사유물로 여기는 이명박 정권의 잘못된 통치의 반사이익을 박근혜가 싹쓸이해 챙겨가는 기막히고 어이없는 광경이 당시 빚어지고 있었다.

해리스의 소설에 나타나는 강경 공산주의자들은 무늬만 공산주의자들일 뿐, 그 본질은 스탈린 시대에 누렸던 특권과 부귀영화에 목마른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역사적으로 단죄된 스탈린주의가 다시금 화려하게 부활할 것이라고 믿으며 스탈린의 아들을 추운 러시아 땅에서도 최북단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한겔스크(우리말로 ‘대천사’라는 뜻으로 영어로 풀이하면 Arch Angel)의 한적한 숲 속에 은신시킨 채 외모도, 말투도, 생각도 스탈린과 판박이처럼 보이게끔 교육, 정확히는 사육시킨다.

최순실 패거리의 엽기적인, 동시에 망국적인 국정농단 사태를 접하면서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아크 엔젤」에 나오는 스탈린의 아들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자연스럽게 솟아났다. 문제는 스탈린의 아들은 소설 속의 허구적 인간일 뿐더러 종국에는 집권의 야욕을 이루지 못하지만, 박근혜는 현실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실제 인물로서 일국의 정권까지 잡았다는 점이다.

소설 속의 스탈린 2세를 정신과 육체 양면에 걸쳐 전일적으로 지배한 자들은 소련을 비밀경찰에게는 천국이고, 인민에게는 지옥인 수용소 군도로 되돌리려는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스탈린의 피붙이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국가 운영을 좌지우지할 것을 꿈꾼다. 현실 속의 박근혜를 키우고 움직이는 자들은 재벌과 공무원과 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천국이고,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지옥인 나라로 대한민국을 완벽히 개조해놓았다.

박근혜는 부하가 쏜 총탄에 맞아 비명에 간 전직 대통령의 딸로서 망각의 심연 속으로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본인에게도, 국민들에게도 행복했을 사람이다. 박근혜 정권이 초래한 총체적인 국가적 위기의 책임이 박 대통령 본인은 물론, 아버지 사후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해오던 그녀를 정치권으로 불러내 원칙과 상식의 수호자처럼 행세하게끔 가꾸고 조련한 자들에게도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다.

지금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을 ‘꼭두박씨’라고 부르며 조롱하고 있다고 한다. 꼭두박씨는 아마도 꼭두각시와, 대통령의 성씨인 박씨의 합성어인 모양이다. 그런데 박근혜가 과연 최태민-최순실 부녀만의 대를 이은 꼭두각시였을까? 그녀를 제도 정치권으로 데려온 일차적 책임자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다. 그는 나라 경제를 부도내 정권을 잃은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의 선거 승리를 위한 얄팍한 정치공학적 계산에만 눈먼 나머지 잠금해제해서는 안 될 지옥의 문을, 곧 헬 게이트를 활짝 열어젖혔다. 박근혜를 한나라당의 수장으로, 새누리당의 당대표로 연달아 등극시킨 친박세력 역시 현재의 극성스러운 친박인 이정현과 윤상현과 서청원이든, 과거의 원조 친박인 김무성과 유승민과 전여옥이든 책임 추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은 박근혜가 나빠서 친박세력에서 이탈한 의인들이 아니다. 단지 박근혜가 자기들만의 전용 꼭두각시가 아님이 밝혀지자 박 대통령과 결별한 냉혹하고 교활한 기회주의자들에 불과하다.

미안한 얘기겠으나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 또한 박근혜를 한국의 아크 엔젤로 탄생시키는 일에 크게 일조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김대중 대통령은 동진정책에 지나치게 몰두한 탓에 박정희에게 면죄부와 정당성을 부여해줌으로써 지하세계에 영원히 유폐돼 있어야 마땅할 유신독재의 후예들이 지상세계에서 마음 놓고 활개 칠 수 있는 숨통을 터주었다. 참여정부 최고존엄은 박근혜에게 대연정을 비굴하게 구걸함으로써 박정희 정권의 불의와 분연히 맞서 싸웠던 수많은 사람들을 결과적으로 욕보이고 말았다.

참, 결코 빼놓아서는 안 될 사람이 또 있다. 조갑제씨다. 그가 박정희의 명예회복을 목적으로 펴낸 책들은 박근혜의 정계 진출과 정권 창출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 역설적 사실은 박근혜의 집권이 조갑제가 힘들게 일궈놓은 박정희 신화를 회복 불능으로 완전히 허물어뜨렸다는 데 있다. 허위와 과장, 궤변과 억지로 올린 탑은 거센 태풍이 몰아치는 바닷가에 지어놓은 위태위태한 모래성과 다름없음을 알려주는 냉엄한 진실의 경고다.

한국정치의 해묵은 비극이자 고질적 한계는 국민들과 함께하는 위대한 도전과 모험을 주도적으로 자청하며 오롯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해온 정치 지도자를 찾기가 매운 어렵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는 한겨레신문과 오마이뉴스 등의 유력 진보매체들과 진보진영의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 소위 케어하고 이른바 매니지먼트해주는 선거용 기획상품 성격이 대단히 강하다. 안철수 의원은 타의에 의해 불려나온 수동적 정치인의 이미지로부터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도 국민 속에서 나고 자란, 국민과 함께하는 진짜 자연산의 믿음직한 정치 지도자를 가질 때가 되었다. 그것만이 제2, 제3의 박근혜를 장막 뒤에서 음험하게 만들고 조종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배를 불리려는 어둠의 세력을 발본색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리라. 이를 위해서도 박근혜를 만들고 띄워온 자들에 대한 확실한 심판과 청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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