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지논쟁, 쇄신책이 될까

시민일보 / siminilbo@siminilbo.co.kr / 기사승인 : 2023-10-15 10:5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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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배 전 한국가스기술공사 상임감사

정치권에서 일고 있는 ‘험지’ 논쟁은 유권자의 눈높이에선 참 오만방자한 일이다. 그간 의정활동 행적에 비추어 국토 전체가 험지이거늘, 어디가 험지고 어디가 양지란 말인가. 출마 지역을 둘러싼 자리다툼과 투정은 그래서 가관이다.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인 지역은 ‘양지’고, ‘문전옥답’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통째 뽑아내야 할 대상을 겨냥한 ‘표적 공천’, 또는 ‘저격병 징발’을 통해 혈투를 벌여야 할 곳은 ‘음지’고 ‘험지’인 것도 맞다. 이를 규정하는 정치권의 계산된 전략은 더욱 얄궂다.

일부는 벌써 행동에 옮겼다. 다선을 쌓을 수 있었던 영·호남 꽃자리 지역에서 출마 포기를 만방에 알렸다. ‘괴나리봇짐’을 싸 들고 천리 길 한양으로 떠날 채비를 서두르는 모양새다. 기득권을 포기고 험지 출마를 감행하는 것 자체가 거룩한 자기희생의 용단이고, 의기양양한 자세는 영락없는 전사(戰士)의 모습이다.

수도권 사수는 여야 모두에게 당운이 걸린 혈투다. 서울과 경기, 인천을 합한 인구수는 2천6백만 명, 나라 전체의 50%를 상회한다. 인구 등가에 따른 지역구 의원 수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21대 총선을 기준으로, 전체 지역구 의석의 47.8%, 거의 절반 정도인 121석이 수도권에 몰려 있다. 국가정책뿐 아니라 정치 서비스도 편중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수도권 선거의 승패가 반년 앞으로 다가온 총선의 전체 판도를 좌우하는 이유다.

특히 영남과 호남의 지역구도 속에 사실상 거대 양당이 굳건한 똬리를 틀고 있는 지역들을 빼면, 수도권 선거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현재 더불어민주당이 단독 과반 의석으로 법안 통과를 사실상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도 지난 총선 당시 수도권 압승이 바탕이 됐다. 당시 민주당은 수도권 121석 가운데 85%가 넘는 103석을 싹쓸이한 반면, 국민의힘(그 당시 미래통합당)은 겨우 16석에 그쳤다.

실제 19대부터 21대 총선까지 수도권에서 호남을 텃밭으로 한 민주당은 국민의힘과 의석수 격차를 계속 벌리고 있다. 국민의힘도 수도권 열세 이유 중 하나로 결속력을 자랑하는 호남 출신 유권자들 성향을 꼽는다. 수도권조차 이런 연장선에서 강·약세 지역을 가르고, 출향인 분포도 대소 차에 따라 험지와 양지가 갈린다. 의석 하나 없는 국민의 힘이 호남권 현지에 공드리는 속사정도 수도권 전략의 일환이다.

그렇다고 매양 호남 출신 유권자 표심만으로 민주당의 수도권 우위를 설명하기도 어렵다. 이번 보선이 열린 강서구 민심만 해도 2020년 총선에서 3석 모두를 민주당에 몰아줬다. 하지만 불과 1년 후인 2021년 4월 서울시장 보선에서는 국민의힘을 선택했다. 그런데 지난해 3월 대선에서 다시 민주당으로 돌아섰던 민심은 불과 3개월도 안돼 치러진 6월 지방선거에서는 국민의힘에 힘을 실어줬다가 이번 1년 4개월 만에 다시 민주당으로 향했다.

영·호남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음지가 양지가 되고, 양지가 또 음지도 될 수 있는 자연의 순환원리가 적어도 수도권에는 작동될 수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이를 봐도 영·호남의 비옥한 정치영토, 문전옥답의 안락한 기득권을 벗어던질 바에는 개척자다운 정신무장이 우선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출신 지역만을 내세워 득표를 기대하는 정치도 수명을 다하는 분위기다. 유권자들의 인식과 이해관계도 변했다. 전국이 1일생활권내 들면서 '출향민 정치'를 주도하던 세대가 퇴장하면서 원적(原籍) 개념도 희미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집권 이후, 거대 야당의 위력에 힘 한번 제대로 못써본 윤석열 정부다. 여당으로선 내년 집권 3차에 치르는 22대 총선 승리가 안정적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한 절체절명의 사명을 띤다. 국정에 무한 책임이 있는 집권당부터 쇄신과 변화의 몸부림은 의당 있어야 할 일이다.

총선을 반년 앞둔 각 당도 이런 흐름을 읽는다면, 인물중심 공천, 정책위주 선거전략, 지역기반 생활밀착형, 유권자 친화력 등을 선거전 포인트를 새롭게 잡을 일이다. 괜한 연고권에 기대기보다 시시각각 변하는 민심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에 맞는 전략을 구사하는 정당이 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지 않을까 싶다

오로지 공천에 유리하고 지역의 컨디션 좋은 곳 만을 물색할 욕심은 접어야 한다. 험지논쟁을 둘러싸고 서로가 기세를 떨치듯 “누군 약하니, 보낼 테면 누굴 보내라”식의 지금 벌이고 있는 대거리. 이는 유권자를 호구로 여기는 태도다. 대의정치에서 속된 말로 “(여야가) 지네들끼리 찢고 까부르고, 흔들고 저울질한다”는 비판이 비등하다. 겸손함이 없다. 말 그대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꼴’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승리지상주의’만 판치는 세상이다. “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 고향을 버릴까”, 고도 산업화에 따른 수도권 집중을 벌써부터 예견했던 70년대 유행가 ‘흙에 살리라’는 당시 한국 사회 실상을 비추는 커다란 울림과 공명이 있었다. 말로는 지방소멸을 염려하고 수도권 집중을 우려하면서 수도권 험지 출마 공표를 거룩한 성전으로 삼는 정치권이야말로 정말 요지경 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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