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치우의 인물채집] "독불장군"은 죽었다.! 인터불고그룹 회장 김삼남 편

시민일보 / siminilbo@siminilbo.co.kr / 기사승인 : 2023-07-04 15:28:38
  • 카카오톡 보내기
  • -
  • +
  • 인쇄
 
'인터불고' 그룹 김삼남 회장을 원주 '인터불고호텔' 로비에서 만났다.

 

로비에서 현장업무지시를 하고 있던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일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축구광이나, 야구광처럼,

35년 전 전에 그는 이미 '뱅커'였다.


시험봐서 그럴듯한 직장에 취직 못할 걸 아는 현명한 백수 김삼남은 복덕방에서 일하는 보기드문 청년들을 지켜봤다.


보통의 청년들이 취직시험 준비를 위해 날밤을 새우고, 쪽집게 과외를 하는 학원에 진을 치는 풍경이 익숙한 세상에서, 노인들이 모여드는 복덕방에 나타난 그 청년들은 몇달만에 대기업 임원들이나 탈 수 있는 차들을 몰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을 지켜보던 백수 김삼남은 전국의 복덕방을 접수하기로 했다.


돈이 흐르는 길목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돈길을 촘촘히 다져서 돈의 흐름을 빠르게 잡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슬로우! 슬로우! 퀵! 퀵! 돈의 스텝은 춤보다 섹시하다!

전국의 부동산을 자기자산으로 보는 백수청년에게 접수당한 복덕방들은 백수였던 김삼남이 시키는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팔라면 팔고 사라면 샀다.


왜? 돈이 흘러 가는것이 보이니까,

신흥종교의 교세는 간증으로 확장된다. 김삼남이 만든 "부동산 뱅크"는 불길같은 간증을 쏟아내고 있었다.


"태초에 땅이 있었고 사람들은 길을 냈다.


그 길가의 땅을 사서 돈을 벌고 건물을 지으면 "우후죽순"처럼 돈이 솟아났다!"


'부동산 뱅크'는 길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참이나 진리나 빛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돈이 흐르는 길에 열광했다.


피부관리 샆이나 골프연습장에서 진을 치던 아줌마들이 끼고 다니던 성경책이나 패션지 보다는 부동산뱅크를 탐독했다.


그리고 그녀들은 돈길을 찾아 나섰다.


그덕에 그는 부동산 실물거래하는 은행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자 진짜 돈만 거래하는 은행들이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부동산은 원 단위 거래가 아니라 억단위 거래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그를 '회장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부동산 파이낸싱 이라는 역사를 만들었지요. 그리고 디벨로퍼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땅 이 있으면 허공에 집을 지어 팔 수 있었으니까요. 좋은 땅을 계약하고 10퍼센트의 계약금을 준 상태에서 허공에 그림을 그려서 그걸 팔아 버리는 거지요. 그것도 분양가 전액을 받고..."

 

그는 역전의 용사답게 말했다.


"은행의 '파이낸싱'이라는 역사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저는 진짜로 꿈꾸던 "디벨로퍼"로 변신하게 됐습니다."

컴퓨터를 통한 온라인 세상을 직감한 김삼남회장은 월간지로서는 유일할 정도로 파격적인 150억에 '부동산 뱅크'를 매각하고 본격적인 디벨로퍼로서의 인생을 시작하며 주식회사 '세중건설' 등 7개 계열사를 설립, 우방건설,삼부그룹등 당시 쟁쟁한 회사들과 코웍하며 1만1800세대의 아파트를 분양했다.

"돈이 밀려들어 오는데, 정말 현실감을 잃게 되더라구요. 영화에 나오는, 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해봤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님이 말씀 하셨지요. '나는돈이 아니라 네가 행복 했으면 좋겠다!'라고 하셨지요.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돈으로 그것도 다 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개인계좌에 수천억의 잔고가 있을때, 그는 아마도 세상이 손바닥처럼 보였을 거다.


군부대가 철수한 길없는 땅도 헐값에 사서 길을내고 '인허가 불가'라고 아무도 안사는 땅을 접수해서 기술적 소송으로 금싸라기 땅을 만들었다.


IMF도 그에겐 기회가 되어 주었다. 비상식적 최저가에 부동산을 사들몄고 꼭대기서 팔았다. 돈은 그를 향해 거침없이 밀려 들었다.

" 나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번도 한 적 없는데, 정말 사람이 죽더라고요. 보통사람도 아니고 공인이... 선거비용으로 몇백억을 지원했거든요, 마흔두살에 세상이 무서워서 유랑길에 올랐습니다."

중국을 주유하던 그는 2008년 북경올림픽을 위한 인프라 사업에 참여하며 베이징 '야인촌'에 땅을 구입, 포스코와 함께 한국식 고급 아파트를 지어서 780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며 분양에 성공했다.

거기까지가 그의 일취월장 성공기록 이라고 사람들은 기억할거다.


그후에 그냥 망한 게 아니라 감방까지 다녀 왔으니까 동반상승하던 우방건설에 했던 쌍방 보증이 도화선이 됐다. 

"우방건설, 성원건설과 함께 성장했는데 같이 망하는 게 숙명인가 싶었지요. 행복하지 않더라구요. 독방에 앉아 그전에도 내가 행복하지 읺았다라는걸 그때 알았어요. 행복의 실체를 느꼈고, 행복하고 싶었는데 850억의 빚을 안고 행복하기는 쉽지 않았지요."

850억의 빚으로 남은 사내, 그는 전염병 환자처럼 세상과 격리되어 그저 살기만 했다.


그때, 처음 손을  내민건 전직 은행장 이었다. 진짜 돈을 관리하던 그가 이렇게 말했단다.

"디벨로퍼는 꿈만 있으면 된다!"고 그날부터 머리속에 각인된 빚 850억과 7000억이 있던 자신의 계좌를 지웠다.


그 빈자리에 디벨로퍼답게 꿈을 채웠다.


그리고 소작농처럼 일했다. 만 4년만에 빚을 모두 갚았다. 그리고 이제는 행복해지기 위해 일했다. 잠시 감방살이를 하는동안 어머니가 넣어주신 성경책을 읽었다.


그 인연으로 소망교회에서 장애우들을 만났다. 

"소시적부터 딴따라끼가 있었거든요. 제가 웬만한 악기는 다 다룰 줄 알지요."


장애우로 구성된 작은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거기서 그는 수퍼맨이다.거기있는 악기는 다 가르칠 수 있었으니까, "이제서야 어머니가 말씀하신 '행복'을 이해했다."며 쑥스레 웃는 표정이 천진하다.

그는 여러번 "행복하다!"고 말했다.


30대 초에 부동산 뱅크를 만들고 만 35세에 부동산뱅크를 팔아 150억을 번 사내, 그 돈으로 수천억 버는데 3,4년, 베이징 '야인촌'의 기적, 그러나 교통사고로 부인과 사별후 행복과 불행의 경계를 본다.


생전 처음 감방을 경험하기도 하고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음을 절감했다.

"일에 집중하고 봉사활동을 신나게 하다보면 살아 있다는 걸 느낍니다. 어머님이 옳았지요." 돌아온 탕아처럼 고백하는 그에게 넓은 집무책상 위에  수북히 쌓인 서류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직도 돈 많이 벌고픈가 봐요?"

"아, 옛날처럼 말구요. 행복한 만큼 일하고 누군가에게 행복을 전도할 만큼 일해요."

"그렇게 보기엔 서류가 너무 많다"고 하자 "같이 행복해져야 할 사람이 좀 많다."며 들킨 듯 어색한 표정, 웃는건가?

"인터불고그룹을 인수할때 다들 놀랐다."고 하자 "창업자의 마음이 담긴 이름 인터불고는 스페인어로 "모두의 마음과 뜻을 함께하는 화목한 마을"이란 뜻입니다. 창업자의 마음을 지키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주로 원주 인터불고호텔에서 일하고 서울사무실은 월요일만 출근한다.

"원주에선 주로 풀 뽑는 일, 잔디 심는 일 합니다. 땀나고 힘드는데  의외로 재미 있어요. 물론 월드클래스의 일도 하지요, 세계적인 수준의 와이너리를 만들고 또 'Ioc월드그랑프리' 당구대회를 원주 인터불고에서 주최합니다. 전세계로 생중계가 되거든요. 당구인구 1000만명의 당구 강국 코리아가 곧 온림픽금메달을 추가하게 될 겁니다. 인터불고가 후원 합니다!"

"요즘엔 Kbs 신창석 PD가 이끄는 'ok좋아! 연예인 봉사단'과 짜장면 봉사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며 고소하게 웃는 그의 모습이 '인터불고' 촌장답다.


모두의 마음과 뜻을 함께하는 화목한 마을 '인터불고'
그 곳엔 '독불장군'이 없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