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세 스승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6-08-27 19: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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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 영(열린우리당 전의장) {ILINK:1} 장준하·강원용·박현채, 올곧은 ‘실천적 지식인’의 전범(典範)

8월17일은 장준하 선생 기일이고 박현채 선배의 기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올 8월17일에 강원용 목사께서 세상을 뜨셔서 또 한분의 큰 스승을 여의게 되었다.

올해도 예년처럼, 장준하 선생의 31주기인 8월17일 오전 9시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법원리에 있는 천주교 공원묘지에서 선생의 추도식을 거행했다.

나는 지난해 30주기 추모행사를 무난히 끝냈으므로 이번 31주기 추도식을 모시고 난 뒤에 기념사업회 회장을 물러나기로 했다.

장준하 선생의 추도식을 마친 뒤, 묘소에 참배한 인사들과 점심 식사도 함께 나누지 못하고 급히 매달 17일에 모이는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의 약칭) 월례모임에 갔다.

장준하 선생께서 세상을 뜨신 1975년에 생겨난 동아투위. 모임은 그 동아투위 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있었던 무교동의 선지해장국집 부민옥에서 낮 12시에 진행된다. 오랜만에 뵙는 김명걸 선배 곁에 자리를 잡고 자연스레 며칠 전부터 병석에 누우신 강원용 목사님에 관한 말씀을 나누게 되었다. 12시30분 아드님 강대인씨로부터 목사님께서 12시5분 소천하셨다는 전화가 나에게 걸려왔다. 그곳에 모여있던 동료들은 모두 애도의 뜻을 표했다.

장준하 선생·강원용 목사, 동아투위와 깊은 인연

장준하 선생과 강원용 목사는 동아투위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장 선생께서 70년대 초부터 전개하신 민주화운동
과 통일운동은 언론자유수호운동을 벌이던 동아기자들과는 긴밀한 연계 속에 진행되었다.

장 선생과 동아기자들이 하나의 운동으로 본격적으로 묶여진 것은 1973년 말 장 선생과 백기완 선생이 주도한 유신헌법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 벌어지면서부터였다. 동아기자들 일부가 서명운동본부를 자처하면서 각 언론사의 기자들에게서 서명용지들을 거두기 시작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긴급초치 1, 2호를 발동하여 장·백 두 선생을 구속하고 개헌청원운동을 힘으로 봉쇄했다. 수감된 지 거의 1년만에 심근경색 등 병환 때문에 병보석으로 석방된 장 선생은 친지들이 보내준 치료비를 광고탄압으로 시달리던 동아일보의 격려광고에 내놓았다.

강원용 목사 역시 우리들 해직언론인들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기독교계가 중심이 되어 벌인 양심수 석방운동과 크리스천 아카데미가 실시한 노동·농민운동을 지원하는 중간집단교육 프로그램에 강 목사가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장준하 선생과 강원용 목사는 북쪽을 고향으로 둔 기독교인들이며 장 선생이 1918년, 강 목사가 1917년생으로 나이도 한살 차이다.

직선적·투쟁적 장 선생, 언제나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지사

부친이 목사였던 장 선생은 중국대륙에서 일군을 탈출, 6000리를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걸어서 중경임시정부의 김 구 주석을 찾아가는 결단에서 보여지듯 언제나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지사였다. 직선적이며 투쟁적인 장 선생은 운명 직전 젊은 시절의 오랜 동지들에게 유신정권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총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씀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강 목사의 대화문화, 양 극단(여야, 군부와 민간, 재계와 노동계 등)의 간극 줄여

강 목사는 해방 직후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나고 김규식 박사의 비서로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우리 현대사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강 목사가 피난을 가지 못하고 인민군 치하에서 보낸 기아와 죽음의 공포 3개월은 그 후 강 목사의 생애를 지배하는 화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후 미국에 유학을 가서도 우리 사회가 머지않아 맞닥뜨리게 될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조금이라도 얻기 위해 유니온 신학교의 라인홀트 니버, 폴 틸리히 교수를 찾게 되었을 것이다.

극우반공 이데올로기와 그 반대편의 중간 어딘가에 선다는 것,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사회가 민주화와 산업화를 상당한 정도 성공적으로 이루고난 지금, 89세를 일기로 타계한 강 목사를 그나마 한국사회가 이만한 수준으로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도록 만든 최대의 공로자로 기억하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생소했던 대화문화와 학습이 극단적으로 갈라져 서로 증오하기만 하던 여야, 군부와 민간, 재계와 노동계가 점차 이야기 상대로 서로를 바라보게 만들었던 것이다.

경제학자·사회운동이론가 박현채, 분단냉전시대에 끊임없이 비판적 메시지 던져

8월17일에 유명을 달리한 또 한분이 박현채 선배다. 박 선배는 1995년에 돌아갔으니까 올해가 11주기째다. 10주
기에 맞춰 내려던 전집 7권이 올해 나왔다. 박 선배가 경제학자로, 사회운동의 이론가로, 저술가로, 가장 오랜 세월 대학시간강사로 지낸 일은 잘 알려진 이야기였다. 분단 냉전시대에 박 선배가 비판적 지식인으로 이 사회의 한 구석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로 메시지를 발신한 것은 송곳으로 커다란 얼음벽을 깨뜨리는 작업이었다고 할 것이다.

우리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따로 따로 혹은 함께 기여하고 큰 발자취를 남긴 장준하 선생, 강원용 목사, 그리고 박현채 선배가 8월17일 같은 날짜에 세상을 떠나셨던 일이 우리 모두 함께 기억할 일일 것 같아 몇 자 글로 옮겼다. 세 분의 명복을 빈다.

<이 글의 전문은 이부영 열린우리당 전 의장 홈페이지에 게재돼 있습니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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