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마음의 안식처이다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6-09-14 21: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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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성 중(서초구청장) ‘여우는 죽을 때 머리를 고향으로 돌리고 연어는 태어난 강물로 돌아가 알을 낳고 죽고, 거북은 바다에서 30~40년 뒤 알에서 깨어난 곳으로 돌아가 다시 알을 낳는다’고 했던가?

한낱 미물인 짐승의 마음이 이럴진대 이런 저런 이유로 고향을 떠난 우리네 인간의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우리 주변을 보면, 북에 두고 온 고향 산천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명절 때마다 휴전선을 찾는 실향민들이 많이 있다. 한걸음이라도 고향에 더 다가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리라. 더 이상 다가설 수 없고, 볼 수 없는 고향을 향해 가져간 빈 술잔에 술을 채우고 멀리서 망배함으로써 실향의 애틋함을 달랜다.

실향의 아픔이 이들 피난민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구 주민들의 아픔은 보다 현실적이다. 대대로 물려오던 전답과 정든 가옥을 수장하고 어쩔 수 없이 삶의 터전을 떠났던 그들이다. 그들 대부분이 생의 반환점을 넘어선 사람들이라 낯설고 물설은 타향에서의 적응이 쉬울 리가 없었을 터이다.

3년 전에 만나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들었던 우리 동네 곽 선배의 고백은 고향의 존재가 어떤 것인가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나보다 열 살 위인 곽 선배의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되던 해에 도망치듯이 고향을 떠났다. 곽 선배의 아버지께선 오랜 폐질환으로 고생하시다가 끝내 세상을 등지자, 황급히 남은 가산을 정리하고 미련 없이 고향을 떠났던 것이다.

부산으로 간 선배는 갑자기 어머니마저 병으로 약해지자 창졸지간에 여동생과 어머니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다.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할 정도로 갖은 고생을 다했다. 그 덕분에 여동생 둘을 고등학교까지 졸업시키고, 자신도 결혼하여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렇게 아버지의 빈자리를 어느 정도 채우고 나니 문득 ‘내겐 고향이 없다’는 공허감이 찾아와 견디기 어려웠었다고 했다.

어느 해 설날, 곽 선배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집을 나와 승용차를 몰았다. 세 시간 남짓 달음질 쳐 도착한 곳은 고향 남해. 마을 어귀에 도착한 곽 선배는 순간 숨이 멎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차문을 열고 내리려던 곽 선배는 ‘불쑥 찾아 온 자신을 반겨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자문해보니 차마 차에서 내릴 수 없더라는 고백이었다.

그때 곽 선배가 했던 충고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부모님께서 모두 돌아가시면 자네도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떠날 때 떠나더라도 고향집만은 처분하지 말고 그대로 놔두고 시간 나면 가서 집을 손봐라’라는…

다행히 나는 아직도 고향에 돌아갈 집이 있다. 게다가 언제든지 나를 반겨 줄 어릴 적 친구들도 있다. 어쩌다가 내가 마음이 울적해져 갈 적에 멀리서 나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번개처럼 달려와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준다. 그럴 때 마다 나는 고향의 푸근함과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곤 했었다.

맑은 날은 더 없이 화사하여 나를 즐겁게 해주고 궂은 날은 내 마음을 위로해 줄 안식처가 돼 주고, 변함없는 듯 변화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를 고향은 지킬 것이다. 내가 고향을 버릴지언정 고향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고향은 부모와 같은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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