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로트렉은 열두살 되던 해에 추락 사고로 성장이 멈춘 장애인이었다. 그런가 하면 두꺼운 입술과 혐오스런 외모로 여자들은 물론 집안에서조차 그를 외면하였다. 다행히도 그림 솜씨가 있어서 캔버스를 평생 친구이자 유일한 도피처로 삼았다. 하지만 끝내 자신의 비극적인 삶을 극복하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에 빠져 서른일곱 살의 나이로 요절한 불행한 예술가다.
나는 영화 ‘물랑루즈’ 속의 로트렉을 보면서 우리집 사랑방을 드나들던 한 예술가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서울의 로트렉’으로도 불리던 곱추 화가 구본웅 선생이 바로 그다.
우리 근대 화단에 이중섭과 쌍벽을 이루는 화가면서 시인 이상과의 친밀한 교분 때문에 영화 ‘금홍아 금홍아’ 속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소개되기도 한 구본웅 선생은 사실 할머니의 사촌 동생으로 할아버지의 처남이셨다.
다들 아시겠지만 구본웅 선생 역시 로트렉과 마찬가지로 개화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두 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의고, 돌봐주던 가정부의 실수로 마룻바닥에 떨어지면서 척추를 다치는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살아야 했다. 신체적 장애를 그림으로 극복해 낸 것도 로트렉과 판박이.
피난 시절 한 집에 살았던 선생은 나를 무릎에 앉힌 채 꼭 끌어안고는 당시 유행하던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기도 하고, 이야기책을 읽어 주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종종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종이에 연필로 쓱쓱 그린 그림을, 종이가 마땅치 않으면 이중섭 화백의 그 유명한 은지화처럼 담뱃갑 속 은박지에 꾹꾹 눌러서 그린 그림을 “옛다, 선물이다”하며 건네주시기도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곧잘 그렸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유네스코에서 주최하는 그림 대회에서 상을 타기도 했고, 딸아이들이 자랄 때는 글자 공부를 시킬 때 쓰는 그림카드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카드 한 장 한 장마다 앞면에 소나 닭, 자동차나 전화기, 각종 꽃이나 나무를 그리고, 뒷면에 사물의 이름을 써넣은 카드를 만들어 주었는데, 아이나 아내는 “인쇄해서 파는 카드보다 더 근사한데?”라며 좋아했다. 그림을 그려 오라는 아이들의 숙제를 대신 해준 적도 여러 번인데, 그렇게 그려 간 그림을 제출한 아이들은 늘 최고 점수를 받아 왔다.
천성이 자유분방해서 한 곳에 몰두하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은 성격이지만 그림을 그릴 때면 신기하게 집중도 되고 그 순간만큼은 모든 일을 잊는다.
누군가 내게 지금 하는 일을 다 정리하고 여유 있게 살게 된다면 무엇을 제일 하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그 첫째로 그림 그리는 일을 꼽겠다. 또 그 그림들을 모아 소박하게나마 전시회를 열겠다고 말하겠다. 그림은 내게 여유를 뜻하는 대명사이기도 하고, 어린 시절 “고놈 제법 색깔을 쓸 줄 아는구나”라며 칭찬을 해주시던 사랑 손님들과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일이 되기도 할 터이다.
그런데 걱정이다. “예술은 꼭 삶의 무게만큼 나간다”는 스콜라 철학자 필로스트라투스의 말대로라면, 내가 그린 그림 역시 꼭 내 삶의 무게만큼 나갈 테니 가볍고 얄팍한 밑천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건 어쩐다지.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