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의 하모니카 소리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6-10-30 17:32:16
  • 카카오톡 보내기
  • -
  • +
  • 인쇄
한나라당 맹형규 의원 이런 일이 한두 번 되풀이되고부터는 아예 어른들께는 산에 간다거나 운동하러 간다거나 친구와 놀러간다는 소리를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대신 도서관에 간다며 책가방을 챙겨 나와서는 친구들과 함께 산에도 가고 운동도 하고 아무렇지 않게 들어오는 날이 많아졌다.

사람은 무릇 정직해야 하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신조처럼 여기며 사는 나로서는 참으로 괴로운 나날이었다.

“얘, 너 맞고 사는 건 아니니?”

신혼 시절에 친척 아주머니가 함께 부엌일을 거들던 아내에게 조심스레 물어 보시더란다.

하도 엉뚱하고 난데없는 물음이라 손사래까지 쳐가며 “그럴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살지도 않는다”며 대답을 해도 영 믿지 않는 눈치더란다.

새파란 녀석이 얼마나 우악스럽게 대들었던지 친척 아주머니는 다 자라서 결혼까지 한 나를 마누라나 때리고 사는 거친 놈으로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만큼 그 시절의 나는 좀처럼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야생마와도 같았다.

갑갑하고 무거운 집안 분위기를 툴툴 털어내기 위해 자주 찾던 곳이 도봉산이었다. 끓어오르는 혈기를 마음껏 발산하기에는 도봉산의 암벽 등반만한 것도 없었다.

주로 오른 곳은 측면 코스. 십자로를 기어오른 뒤에 트레버스(traverse : 암벽이나 빙벽 등을 옆으로 가로지르거나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행위)로 바위를 옮기면 사람 하나가 겨우 자리 잡고 설 공간이 있었다.

발밑은 천길 낭떠러지여서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 오는데, 그 아슬아슬함이 주는 묘한 쾌감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거기서 한숨을 돌리고는 우리가 ‘먼로 궁둥이’라 부르던 둥근 바위의 갈라진 틈 사이에 팔을 끼워 넣고 온몸을 찰싹 붙인 채 낑낑대며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선인봉 정상에다 밧줄을 매달고 바위산 이쪽저쪽을 겅중겅중 뛰어내려올 때면 몸을 흥건히 적신 땀뿐 아니라 할아버지의 노기 띤 음성도, 할머니의 잔소리도 바람에 실려 시원스레 날아갔다. 거기에 하모니카 연주까지 한 곡조 멋들어지게 곁들이면 그야말로 가슴속 묵은 응어리까지 다 풀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하모니카를 곧잘 불었다.

시도 때도 없이 하모니카를 꺼내 불어서 할머니에게 시끄러우니 그만두라는 핀잔도 종종 들었다.

그러나 달랑 밧줄 하나만이 유일한 의지가 되는 허공에서야 아무도 간섭할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생각지도 않다가 듣게 되는 산중의 하모니카 소리에 함께 바위를 타던 사람들이나 근처의 등산객들은 브라보를 외치며 박수까지 보냈다.

하지만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는 그 선율 속에 사업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가 시골살이를 시작하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엄한 할아버지와 무거운 집안 분위기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욕구, 수시로 부딪치는 할머니와의 갈등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만치 떨어진 박쥐 코스에 오늘도 젊은 날의 나처럼 밧줄 하나에 목숨을 의지한 채 암벽을 오르는 사람들이 보인다.

너무 위험해서 전문가급의 선두가 없이는 타지 못한다는 코스여서 나는 아직껏 한 번도 타보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그들과 함께 매달리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곳곳이 추억 덩어리인 도봉산에 오르다 보니 어느새 나이를 깜빡 잊은 것이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시민일보 시민일보

기자의 인기기사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