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은 길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6-10-31 17: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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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맹형규 의원 잠깐 짬이 나서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 본다는 인터넷 신문을 이리저리 클릭해 가며 읽다가 생각지도 않게 백기완씨가 찍힌 사진을 발견했다. 지난번 농민 시위 때 숨진 전용철·홍덕표씨의 장례식에 참석한 백기완씨를 찍은 것인데 검정 두루마기에 빨간 목도리를 매고 이제는 아예 트레이드 마크가 된 허연 사자머리를 한 모습을 보고는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멋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백기완씨를 처음 만난 게 고등학교 1학년 때니까 지금으로부터 40년은 족히 된 일이다. 우연한 기회에 시민단체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그 단체 이름이 ‘국민생활정화연맹’이었다. 언론인 정충량 선생과 서울시장을 지내신 김상돈씨가 중심이 되어서 농촌 계몽 운동을 하던 단체로, 이분들은 그저 이름만 걸어 놓았을 뿐 실질적인 운영이나 활동은 젊은이들이 맡았다. 백기완씨는 그 단체에서 이를테면 활동대장격이 되는 역할을 맡았다.

그때도 지금처럼 평생 빗질 한 번 해보지 않았을 것 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녔지만 그 모습이 어린 눈에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나도 머리를 기르게 되면 저렇게 해야지’하는 마음을 가졌을 정도였다.

연맹 사무실은 광화문 미국대사관저로 들어가는 길가 왼쪽에 있는 3층짜리 건물 꼭대기의 가건물을 빌려서 사용했는데,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만나게 된 백기완씨를 우리는 형님이라고 부르며 곧잘 따랐다. 그때도 백기완씨의 입담은 대단해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하면 어찌나 구수하고 재미있게 말을 이어가는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런 그를 우리끼리는 은밀하게 ‘구라쟁이’ 또는 ‘백구라’라고 부르며 킥킥거렸다. ‘구라’란 본래 속이거나 거짓말을 뜻하지만, 그에게 붙인 구라라는 별명은 대단히 입담이 세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의 구라를 통해 민족을 배웠고 흙과 땅, 그리고 땀을 배웠다. 또한 멋진 외모에 풍부한 식견을 풀어내는 거침없는 입담까지 갖춘 그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처럼 되기를, 그처럼 살기를 결심하기도 했다.

언제였던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백기완씨에게 “형님, 저 기억하시겠습니까?” 하고 알은체를 했더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단박에 “그럼” 하고는 내 손을 힘주어 잡았다. 나도 그 시절의 까까머리가 아니지만 백기완씨도 많이 늙었다. 가슴속에 타오르는 불길 같은 의지야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겠지만 그 옛날의 활력은 많이 잃은 듯이 보였다. 덧쌓인 세월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 평생을 독재정권과 맞서며 살다가 그로 인해 받은 시달림 탓일 테다. 죽을 때까지 자신의 소신을 바꾸지 않고 굳건하게 지켜 내기란 그만큼 버겁고 어려운 일이라는 징표 같아서 마음이 내내 무거웠다.

연맹 활동은 여름방학이 되면 떠나는 농촌 계몽 활동이 하이라이트였는데, 거의 스무 날 정도 집을 떠나 있어야 하기에 그 준비가 녹록치 않았다. 나는 활동할 마을에 문고를 만들기 위한 책을 모으는 일을 맡았다. 지금이야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만,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출판사를 찾아가서 사장님을 뵙자고 하면 제아무리 큰 출판사라도 거절하지 않고 만나 주었다.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책이 좀 필요하다고 말하면 백이면 백 몇 무더기나 되는 책을 서슴없이 내주었다. 강원도 삼척 노곡면의 마을문고는 그때 그렇게 모아 간 책들로 만들어졌다.

낮에는 조밭을 매고 밤이 되면 야학을 열었다. 그때만 해도 농촌에는 문맹인 사람들이 많아서 야학이라고 해봐야 한글 공부가 고작이었지만 배우는 사람의 의욕과 가르치는 사람의 열기로 교실은 늘 후끈했다. 서울의대생들은 의료 봉사를 맡았고, 서라벌예고 학생들은 논둑길 밭둑길을 다니며 한바탕 공연을 펼쳤다. 우리가 계몽 활동을 하는 동안은 온 동네가 축제처럼 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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