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노교수와 同行因緣을 맺다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6-11-06 15:5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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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근(노원구청장) 경복궁 천학(淺學)을 벗어나는 것이 오늘 답사의 목표이다.

답사방식은 우선 궁궐 안팎의 전각(殿閣)과 그 부속물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그 다음 그것들을 화두(話頭)삼아 분석을 한 다음 그걸 다시 확장 가공하여 거기서 어떠한 미학적(美學的) 코드를 끄집어내는 작업일 터이다.

‘나는 향후 경복궁 천학(淺學)이니 우학(愚學)이니 하는 수모는 당하지 않으리라!’ 하여간 이 천학은 그 설전소동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안도한 것은 궂은 날씨가 급격히 호전(好轉)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튼 두 답사객간에 한판 벌어진 싸움 구경을 하느라 답사일정(踏査日程)은 약간 차질을 빚었지만 뜻 밖의 교훈도 얻었으니 손해를 본 것은 없다. 아무튼 이 천학(淺學)은 배낭 짐을 꼼꼼히 다시 꾸려가며 경복궁 답사를 채비했다. 김밥에 사과 몇 개 그리고 땅콩과자와 생수 몇 병을 챙겼고 여기에 답사노트까지 세심하게 준비를 하였으니 크게 아쉬울 건 없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배낭 짐을 챙기고 답사행로(踏査行路)를 궁리하고 있었는데 웬 노객 한분이 헛기침을 하며 다가왔다. 알고 보니 조금 전 바로 그 영감이 아니던가!

“선생께서는 보아하니 혼자서 구경을 온 것 같은데… 나하고 오늘 답사를 동행(同行)하지 않겠소!”

넉살좋게 불쑥 내뱉는 말투였지만 그 영감은 방금 전 그 청년에게 호통을 치던 그 기세는 없었다. 마치 고향의 이웃집 할아버지같이 유순(柔順)하고 다정하여 금세 말동무가 되었다.

여하튼 그 영감의 난데없는 동행 제의에 일단은 “그러지요…”라고 대꾸했다.

그러나 엉겁결에 그렇게 일단 응수를 하고 보니 금방 정신이 어벙해졌다. ‘과연 그 영감의 신분(身分)은 온전한지 성깔은 괴팍(乖愎)하지 않는지 등등…’

사실 이 천학은 그 양인(兩人)간의 말다툼을 처음 보았을 때는 웬 노망 끼가 있는 광인(狂人)이 나타나 괜한 시비를 거는 줄 알았었다.

‘광대뼈가 양편 볼에 호두알처럼 매우 돌출돼 있었고… 스님도 아닌 것 같은데 중복같은 가사(袈裟)를 걸치고… 거기다가 행색까지 어딘가 엉성하고 남루하여…’ 그래서 별로 호감이 가질 않았었다. ‘게다가 턱수염은 몇 달째 다듬지 않았는지 한 뼘은 자라있고 그 차림이 구질구질하고…’

그럼에도 유독 그 노객(老客)의 두 눈동자는 검은자와 흰자의 명암(明暗)이 분명하여 총기(聰氣)가 넘쳤고 목청은 카랑카랑하였다. 특히 참나무 장지팡이를 오른손에 꽉 쥐고 있는 모습은 혹시 산중 선객(仙客)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천학(淺學)처럼 생각이 들고 또 다르게 보면 천학(淺學)처럼 보이니…’ 정말 혼돈스럽다.
아무튼 그 영감의 동행답사 요구가 워낙 당돌하였는지라 내가 그걸 함부로 거절했다가는 무슨 봉변(逢變)이라도 당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영감이 이 천객(賤客)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킨 것은 무엇보다 방금 전 그 청년이 경거망동(輕擧妄動)을 할 때 그걸 용기 내어 훈계하였다는 점이다. 정말 이 시대의 보기 드문 ‘어르신’이었다.

여하튼 이 천학이 나중에 소문(所聞)을 들어 알았지만 노객은 효자동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향토사학자(鄕土史學者)였다.

그 노객(老客)의 선대(先代)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과 싸우기 위해 의병(義兵)으로 거병(擧兵)을 하였다가 종전(終戰)후부터는 경복궁 근처에 붙박이로 눌러 살기 시작했는데 다행히도 자손들이 번성하여 그 곳의 토박이가 됐다는 거다.

그래서 그 영감은 경복궁 답사 가이드들 사이에 속칭 ‘경복궁 노교수(老敎授)’로 통한다고 한다. 여하튼 그 노객과의 동행 인연은 그러한 만남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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