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덤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아마 캠퍼스를 거니는 내게 눈곱만큼이라도 들뜬 기분이 들었다면 그것은 긴 백양로에 도열하듯 늘어선 나무들이 틔워 내는 연초록 이파리 때문이거나 훈기를 품은 채 코끝을 간질이는 봄바람 때문이었을 거다.
“며칠 뒤에 서울여대 학생들과 미팅이 있는데 나가지 않을래?”
무덤덤하다 못해 무료하기까지 한 내게 과대표가 건넨 미팅 제안은 귀가 번쩍 뜨이는 일이었다. 친구들에게 귀가 따갑도록 듣던 미팅 무용담을 내가 실제로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에 그제야 비로소 대학생이 되었다는 실감이 들었다.
“제일 예쁜 파트너로 정해 준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안 가.”
“맨입으로?”
“커피 한잔 사면 돼? 아니면 밥 한번 살까?”
첫 미팅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혹시나 하고 나갔다가 역시나 하고 돌아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별 기대 없이 나가야 한다는 게 미팅의 철칙이었는데, 나는 그 말을 별로 믿고 싶지 않았다. 왠지 기분 좋은 만남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예감도 들었다. 과대표에게는 ‘예쁜 파트너’를 조건으로 약속대로 밥도 샀다.
카키색 군복 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고 소매는 둥둥 걷어붙였다. 목에는 손수건을 두르고 딴에는 있는 멋 없는 멋을 부린다고 부린 터였다.
동구릉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우리와 상대가 될 여학교의 학생들도 함께였다. 그 중에서도 짧은 머리를 하고 회색 원피스에 굵은 목걸이를 하고 있던 여학생이 내 눈에 들어왔다. 눈도 시원스레 커서 무척 예뻤다. 마음에 쏙 들었다. 아마도 첫눈에 반한다는 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순간 과대표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는 눈짓으로 그 여학생을 힐끗거리는 것으로 신호를 보냈다.
‘찾았어, 내 파트너. 바로 저 여학생이야.’
과대표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가타부타 말이 없어 속이 탔다.
꽃 이름이 적힌 쪽지로 파트너를 정하기로 했다. 같은 꽃 이름이 나오는 사람끼리 파트너가 되는 거였다. 내가 뽑은 쪽지에는 아네모네가 적혀 있었다.
“저, 아네모네 뽑은 분이 누구시죠?”
“전데요.”
수줍은 듯이 고개를 반쯤 숙이고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리는 그녀는 바로 버스 안에서 점찍어 두었던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예쁜 파트너로 짝 지워 달라며 밥까지 산 것이 주효했는지 아니면 인연이 닿으려고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예쁜 파트너를 얻는 데는 성공했다. 그리고 단 하루의 만남으로 그녀가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겸손하고 예의도 바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쳇말로 딱 내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제 학교 제쳐두고 남의 여학교에 출석부를 찍을 지경이었으니 처음부터 좋은 학점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기본 출석조차도 채우지 못해서 받은 F학점이 수두룩했다. 1학년이 끝나고 받은 평점이 1.56이었으니 유급 평점인 1.50에 겨우 0.6점을 넘긴 것이다. 연애의 대가치고는 너무나 혹독했다.
두 딸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다 자라 큰아이는 출가를 하고 작은아이마저도 부모 품을 떠나려고 꿈틀대는 요즘도 우리는 가끔씩 둘만의 데이트를 즐긴다. 너무 바빠서 느긋한 여유를 만끽할 수는 없지만 둘만의 오붓함을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우리의 연애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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