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연유(緣由)에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한 왕도 ‘개경(開京)’을 버리고 굳이 ‘한양(漢陽)’으로 천도했을까? 그 천도(遷都)배경을 알려면 신라 말 고려 초기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이 천학은 당대의 한양천도설(漢陽遷都說)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소위 지리도참설(地理圖讖說)을 빌려오지 않을 수 없다.
‘지리도참설은 알다시피 나말여초(羅末麗初)의 거승 도선국사(道詵國師:827년~898년)가 풍수와 점술을 합동시켜 정립한 예언이다… 인간의 길흉화복은 지세지덕(地勢地德)의 성쇠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다.
왕건(王建)이 송도(松都:개경)에서 고려를 창업할 때도 도선국사가 지리도참설에 근거하여 새 왕조의 군왕(君王)은 일찍이 그 분이 될 거라고 적중시켰다. 그 때문인지 지리도참설은 나라가 혼란할 때면 으레 횡행(橫行)하였다.
혼란의 원인은 무엇보다 왕권의 정통성 시비 때문일거다.
여하튼 그 왕권시비의 중심 화두는 고려사 공양왕 총서에 우왕(禑王)에 대한 폐가입진(廢假立眞)의 기록이 나오는데 그것이 사실이냐의 여부이다. ‘역적 신돈은 당대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과 짜고 그의 아들 우(禑)를 모명(冒名)하여 공민왕 후사라고 속이고… 그 흉계가 탄로 날까봐 생모(生母)를 죽이고 질녀(嫉女)를 시집보내고…’
그래서 태조 이성계는 왕씨의 후손 왕요(王搖)를 공양왕(고려 신종 7대후손)으로 세운거다.
세상에 어찌하여 그런 일이 가능할까! 인간의 권력욕은 스님이라도 끝이 없구나!
그러나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논지를 부정하고 있다. 이성계가 정권을 잡기위해 꾸며낸 역사 조작이라는 거다.
“원래 공양왕은 왕비 노국공주와는 후사(後嗣)가 없었지만… 궁녀 반야와는 자식이 있었는데 그분이 우(禑)였어요… 그런데 태조 이성계 정권이 ‘우왕’을 신돈의 자식이라며 가짜왕으로 몰아부친 것은 권력장악의 정당성을 꾸미려 한 거지요….”
여하튼 폐가입진의 고려사 공양왕 총람 기록은 조선시대에 와서 작성한 승자(勝者)의 기록인지라 그걸 믿을 수 없다는 거다.
그러나 고려 말 혼란정국은 결코 그것 뿐이 아니다.
“왜구와 홍건족이 고려의 남쪽과 북쪽에서 괴롭혔지요… 곡식과 부녀자를 약탈했거든요….”
바로 고려말 정국은 내우외환(內憂外患)이 함께 겹쳤다.
아무튼 그 영감의 강론은 장황(狀況)했으나 집약하면 고려 말 혼란상을 말하는 거다.
당시 고려 공양왕은 흥망성쇠의 기로에서 혼란국정을 무마할 처방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한양천도론(漢陽遷都論)’이다.
그 학설을 확장하여 말한다면 ‘이미 개경(開京)은 지세지덕(地勢地德)이 다 쇠잔하여… 더 이상 고려 수도로써 생기(生氣)가 복덕(福德)하고 왕실이 부흥을 꾀할 수가 없다’는 거다. 바로 그게 소위 지리쇠왕설(地理衰往說)이다 그러나 공양왕의 천도역사를 살펴보면 극히 갈팡질팡하였다. 당시 공양왕은 혼란정국을 잠재우기 위해서 1390년(공양왕 2년)에 한양으로 천도를 하였다. 그렇지만 민심(民心)은 오히려 악화돼 얼마 되지 않아 개경으로 환도하는 고역(苦役)을 겪은 거다.
그렇다면 왜 고려 공양왕은 한양천도를 그만두어야 했을까?
한양천도론에 관한 의문을 풀기위해 노교수의 역사 강론을 정리하여 볼 터이다.
“글쎄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천도사업은 막중한 사안이라 격론(激論)이 있게 마련이죠… 신흥세력들이 남경(한양) 천도론을 들고 나오자 개경의 토호세력(土豪勢力)들은 앞 다투어 반대 상서(上書)를 올렸지요….”
“그 반대 상서라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렇다면 양 진영 간에 격론이 크게 벌어졌겠군요….”
그렇다면 그 찬반 논쟁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실 한양천도론의 화두로 그 중심을 이루고 있던 것은 당시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 출신의 경연관(經筵官:왕의사부) 박의중(朴宜中)의 상서(上書)이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