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천도문제가 재차 불거진 것은 엉뚱하게도 태조 이성계가 태실(胎室)의 명당터를 찾는 과정에서 이다.
태실증고사 권중화의 보고서에는 태실(胎室)은 완산부 진동현(珍同縣)에서 길지(吉地)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겸하여 ‘신도(新都)로서는 양광도(楊廣道)의 계룡산이 좋다’라고 진언하였다. 바로 권중화의 보고는 태조 이성계가 다시 천도결심을 굳히게 하는 단서가 됐다.
“태조 이성계는 1393년(태조 2년) 2월 1일 계룡산을 직접 거동하며… 천도입지(遷都立地)를 손수 결정하고 바로 측량에 들어가 공사를 하였어요… 일사천리로 진행한거죠.”
바로 신도안(新都內) 기획이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천도 시도일 거다.
그렇다면 조정 대소신료들은 그에 관해 어떠한 찬반양론이 있었을까?
첫 번째로 과연 계룡산 신도안이 적지(適地)인가하는 논란이다.
“당초 권중화는 계룡산을 신도 명당터로 보고했는데 이때 태조 이성계가 과연 천하의 길지(吉地)라며 서둘러 결정한 거지요… 그러니까 조정대신들의 의견은 별로 물어 보지 않은 거죠.”
조정실력자들 중 가장 거세게 반발한 사람은 하륜(河崙 :경기 좌도 관찰사)이다.
결국 태조 이성계는 계룡산 신도안이 풍수지리상 쇠패할 땅이라는데 크게 당황하고 공사를 중단시켰다.
“1393년 2월에 착공하여 12월에 중지시켰어요… 그러니까 약 10개월간 공사를 한 거지요.”
사실 신도안엔 지금도 왕궁터의 도량과 초석(礎石)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그 후 태조 이성계는 과연 천도의 야망을 접었을까? 결코 그러하질 아니했다. 하륜에게 고려비록(高麗秘錄)을 토대로 또다시 명당길지(明堂吉地)를 찾도록 명한 거다.
그 천도기획이 태조 이성계의 세 번째 시도이다. 당시 세 곳이 후보지로 등장했다. ‘①고려의 남경 한양(漢陽) ②지금의 서대문구 안산무악(鞍山毋岳) ③경기도 적성(績城)의 광실원(廣實院) 등등…’ 천도후보지에 대한 논쟁은 정말로 뜨거웠다.
한양천도론은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주장이다.
‘한양은 사면(四面)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城)을 쌓아 도읍(都邑)을 정할만 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 꼭 도읍을 옮기려면 이곳이 좋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소갑(扶蘇岬:송악의 옛 이름) 명당이 첫째요… 남경(南京:한양)이 다음입니다.’
그러나 하륜은 안산의 무악천도(毋岳遷都)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전적(典籍)서 양원식은 적성 광실원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천도적지(遷都適地)로 태조 이성계는 어디를 마음에 뒀을까?
“안산무악이 그의 의중이었어요. 그곳에서 유숙까지하며 두루두루 살펴봤으니까요…. 그렇지만 당시 한양천도론이 민심의 주류였어요… 결국 그에 따라 한양으로 정한 거지요.”
바로 그때가 1394년 태조 3년 8월 21일이었다. 당대의 실력자 좌정승 조준, 우정승 김사형의 천도보고서는 이러하다.
‘한양 땅을 보건데 안팎 산수(山水)의 형세가 훌륭한 것은 옛날부터 이름난 곳이요.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가 영구히 도읍(都邑)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천도(遷都) 논쟁은 예나 지금이나 정말 뜨겁구나!
이 천학은 ‘어디가 왕도(王都)로 온당 하느냐’를 심판하기 위해 자칭 역사 판관(判官)노릇은 않겠다. 그러나 한민족의 수도가 왜 자꾸 남천(南遷)하느냐에 대하여는 진실로 불만이다.
조선은 개성에서 한양으로 남천(南遷)하더니 우리 민족의 역사무대에서 만주땅을 잃어버렸고… 그런데도 현대판 위정자들은 북천(北遷)을 생각하기는커녕 기어코 남방으로 가야한다니….
우리 세대는 그걸 말하고 답(答)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남천론(南遷論)에 대한 흥분은 그만 가라 앉혀야겠다. 괜히 혈압만 올라갈 터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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