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별명 맹다구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6-11-15 1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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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맹형규 의원 장애인이나 소외된 사람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게 되면 나는 늘 이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환경이 열악한 만큼 더 열심히, 더 치열하게 살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뜻일 텐데, 이것은 통신사 근무를 하는 동안 내가 나에게 늘 주문처럼 들려주던 이야기였다.

지금은 연합통신사가 전체 언론의 보도 방향을 이끌어 갈 정도로 탄탄한 입지를 확보하고 있지만, 내가 입사를 하던 시절만 해도 ‘통신사의 비애’라는 말이 보통명사처럼 쓰였다. 일간지 기자를 제일로 취급하고 통신사 기자는 그보다 낮은 수준으로 본다고 해서 나온 말이었다.

기자 사회는 선후배 관계나 서열이 엄격한 편이다. 신참 기자는 ‘선배들로부터 배워야 할 게 아직도 많은 존재’라는 인식이 있고, 행여 신참이 특종을 해온다손 치더라도 ‘소가 뒷걸음질치다가 쥐를 잡은 격’쯤으로 취급했다.

그런데 내 경우엔 뒷걸음질로 잡은 쥐라고 치더라도, 일주일에 한두 건씩은 보통이었으니까 그 빈도가 너무 잦았다. 회사는 마침내 신참에게는 그토록 인색하다는 특종상을 내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선배와 동료들은 나를 ‘맹다구’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억척스럽게 오기로 버텨 낸다는 뜻의 깡다구와 내 이름을 합쳐서 만든 말이다.

억척과 오기.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정말 오기를 가지고 억척스럽게 일했다. 일단 기자가 되는 순간부터 이미 경쟁은 시작된 것이다.

선배라고 해서 양보하거나 후배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는 치열한 경쟁. 후배가 살아남는 방법도 억척과 오기요, 선배가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는 방법도 다르지 않다는 게 아직도 변함없는 내 생각이다.

이쯤 되자 같은 출입처를 드나들던 일간지 기자들은 내가 보이지 않으면 ‘오늘은 또 뭘 터트리려나’ 하며 불안해했고, 모습을 나타내면 내 표정 속에서 해답을 읽으려고 애를 썼다. 나의 특종은 곧 자신들의 낙종을 의미하는 데다 낙종은 심한 질책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었다.

긴장을 하기는 회사의 선배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갓 들어온 신참이 연일 휘젓고 다니는데 지금까지처럼 보도자료나 받아다가 기사를 만들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신참보다 질 떨어지는 기사를 데스크에게 넘겨주는 건 자존심 때문에라도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다.

기사 하나를 만들기 위해 발뿐 아니라 이제는 머리까지 동원해야 했을 터이니 내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으리라는 사실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실제로 선배들 중에는, 특히 바로 위 선배들 중에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선배들과는 달리 회사에서는 나를 아주 귀하게 여겼다. 그즈음 합동통신에 새롭게 취임한 박용곤 사장은 “명색이 통신사인데 견문을 넓혀야지 않느냐”며 함께 여행을 떠날 젊은 기자로 나를 지목할 정도로 대접을 받았다. 영국의 로이터, 독일의 DPA, 프랑스의 AFP, 미국의 AP, 일본의 교토통신을 순례하는 30일간의 긴 여행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영광이요, 여행의 의도처럼 견문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1978년에는 자체 회사로서는 처음으로 해외연수 계획을 세웠는데 그 첫 번째 대상자로 또다시 내가 뽑히는 행운을 얻었고, 그로 인해 1년 동안 미국의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연수를 겸한 학업을 할 수 있었다. 이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합동의 황태자’니 뭐니 하며 부러워하기도 하고 수군덕거리기도 했다.

짧은 칼을 쥐었다고 푸념만 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결과는 확인하지 않아도 뻔하다.

콤플렉스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그것을 딛고 이기려고 노력할 때 누구든 겸손한 일등으로 거듭날 수 있다. 내 삶이 그 증거다. 내 별명 ‘맹다구’는 결코 저절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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