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銅錢) 3개의 양면에 길(吉)자와 흉(凶)자를 새기고 그것을 던져… 길(吉)자가 가장 많이 나온 곳을 천도지(遷都地)로 결정하기로 하였어요… 이 척전의식(擲錢意識)은 1404년 1월 6일 태종의 주재아래 한양의 종묘에서 이루어졌어요.”
“궁궐은 송도로 옮겨갔지만 종묘는 한양에 그대로 있었어요… 그리고 완산군(完山君) 이천우(李天祐)에게 반중(盤中)에 동전을 던지게 하였어요.”
조선 초 다섯 번째 천도사업은 그 점술점괘(占術占卦)에 따라 한양으로 정해진 거다.
태종이 그 천도계획에 따라 1405년 한양에 또 하나의 궁궐을 세웠는데 바로 그것이 창덕궁(昌德宮)이다.
혹자는 ‘세상에 이방원은 수도입지(首都立地)를 아무데나 함부로 정하다니!’라며 비아냥할 수 있을 거다.
사실 천하제왕(天下帝王)들은 천명(天命)이 없으면 수도(首都)를 함부로 정할 수 없는 천사(天事)일 터이니 아마 그 점괘(占卦)는 하늘의 뜻이라고 간주했을 거다. 여하튼 지금까지 이 천학은 여말선초의 천도사업의 전모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천도경위를 아는데 만족해서는 안 된다.
과연 몇 차례 우왕좌왕하였는가!
‘공민왕 한양천도포기(재위:1351년~1374년)→공양왕 한양천도 및 개경환도(1390년~1391년)→태조 이성계 신도안 천도공사 중단(1393년)→태조 이성계 한양천도(1394년)→정종 개경환도(1398년→태종 한양재천도(1405년)’
과연 그 천도사업이 얼마나 많은 갈등과 비용을 지불해야 했던가! 그렇다면 여말선초의 천도사업의 교훈이 무엇이더냐! 우리가 주목해야할 역사교훈이라면 아무리 좋은 정책도 민심을 얻어야 한다는 거다.
조선 초 중추원 이직의 직언(直言)이 그걸 대변한다.
“대저… 도읍을 정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로써 한두 사람의 소견(所見)으로 천도사업을 정할 것이 아니며 천명에 순응해 민심을 따라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보고를 받고 그의 고집을 바꿨지요… 안산무악 천도의 주장을 접고 한양으로 결정한 거지요.”
지금에 우리사회는 소위 행정중심도시 이전을 둘러싸고 떠들썩하다. 그렇지만 이 천학은 그에 관한 어떠한 소견도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한양천도 강좌에 고궁야화 한 토막을 첨가하여 흥미를 부가하는 것 까지 그만둘 수는 없다.
바로 궁궐성어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설명하려는 거다.
현대판 위정자(爲政者)들은 정치연설에서 ‘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말할 때 유의미한 어구(語句)를 동원하기를 좋아하는데 그 중 으뜸이 ‘종묘사직이 무너진다’이다.
그렇다면 그 어구(語句)에 무슨 깊은 뜻이라도 있더냐?
그 해답(解答)을 풀려면 한양천도를 할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 왕도(王都)의 시설로 보느냐?’를 알아야 한다.
‘왕궁(王宮)일까? 종묘(宗廟)일까? 사직단(社稷壇)일까?’ 혹자는 그것이 도대체 무슨 대단한 의미라도 있느냐고 물을 터인데 굳이 그 답변을 강요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천도사업에 선묘후궁(先廟後宮)의 역사(役事)를 취한 거다. 사실 현대판 인간들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게다.
어찌 산 자의 궁궐 ‘경복궁’보다 죽은 자의 영궁(靈宮)·종묘를 더 중시하였을까?
무슨 이론(理論)으로 그걸 합당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조상신을 숭모하는 조선의 통치이념 유가(儒家) 사상에다 조상의 음덕(蔭德)이 후손들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동기감응설(同氣感應說)이 결합하였기 때문일 거다.
결국 조선의 창업세력들은 종묘가 궁궐보다 우선하거나 적어도 대등하게 여긴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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