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5월쯤이었던 것 같은데 브레진스키가 서울을 거쳐 북경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각적으로 ‘이거 뭔가 있겠구나’ 하는, 마치 동물 같은 기자 감각이 발동했다. 서울이면 서울이고 북경이면 북경이지 서울을 거쳐 북경에 간다는 것에는 말 못할 뒷이야기가 숨겨져 있으리라는 추측이었다. 대선 유세 때부터 주한미군 지상군 철수를 공약했고 1977년 취임하자마자 이를 정책으로 확정한 카터 행정부와 외국의 내정간섭을 배척하고 자주 외교를 펼치려는 우리 정부가 갈등을 빚던 미묘한 시기여서 브레진스키의 서울과 북경 방문은 단순한 방문 이상의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매주 목요일에는 대통령이 주재하는 청와대 대책회의가 열렸다. 분명히 브레진스키의 서울 방문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것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래서 그 다음날인 금요일, 평소 친하게 지내는 외무부의 고위 관리 방을 찾았다. 당시 차관으로 내정되어 있던 분이었다. 나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슬쩍 브레진스키의 서울 방문에 관한 얘기를 던졌다.
“브레진스키가 여기 왔다 북경에 간다면 우리 정부도 부탁할 게 많겠네요?”
그러자 주저하는 빛도 없이 그가 꺼낸 대답이 바로 특종감이었다.
“그러잖아도 어제 회의에서 브레진스키가 왔다 가면 우리 쪽 얘기도 북한에 전하고 중국이 남북에 어떤 역할을 좀 해주길 바란다는 얘기를 나눴다고.”
사실 이런 정보는 국가 기밀에 속할 내용이었다. 냉정하게 따지면 기사화해서는 안 되는 내용이 분명했다. 머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아마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이 양반이 말실수 한 걸 깨닫고 오프더레코드(off the record : 기자회견이나 일반 면담 등에서 기록하지 않거나 공표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거는 일)를 걸지도 모른다. 그 말이 나오면 기사화는 물 건너가는 거다.’
대화 도중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는 그 길로 곧장 기사를 만들어 회사로 송고했다. 브레진스키가 북한에 전할 우리 정부의 모종의 메시지를 가지고 북경을 방문한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기사가 나가자 청와대가 발칵 뒤집혔다. 대통령이 주재한 회의 결과를 누가 언론에 흘렸는지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기사를 쓴 기자부터 잡으려고 회사며 집으로 정보부원들이 들이닥쳤다. 그때까지도 외근을 하느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까맣게 몰랐던 나는 부장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고서야 일의 내막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부장은 목소리부터 다급했다.
“오늘 집에도 들어가지 말고 어디론가 없어지라고.”
“왜요?”
“지금 검은 지프를 탄 놈들이 자네를 잡으러 다니니까 일단 피해!”
곧바로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아내는 아침부터 집 밖에 시커먼 지프가 서 있다면서 덜덜 떨고 있었다.
평소 좋아하던 선배 기자인 박동진 씨에게 사정 얘기를 하고 하룻저녁을 묵었다. 그리고 이튿날, 부장의 지시에 따라 조사에 응하기로 했다. 덩치가 산만한 정보부원 서넛이 기다리고 있다가 연행을 했다. 조사실이 있는 남산까지는 훗날 주일공사를 지낸 김기성 선배가 동승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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