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에서 벌인 특종 뒤풀이(下)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6-11-19 16:14:46
  • 카카오톡 보내기
  • -
  • +
  • 인쇄
한나라당 맹형규 의원 조사실의 육중한 철문이 덜컹 닫히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마음속으로 주문처럼 의지를 다졌다.

‘나는 기자다. 나는 자랑스런 기자다. 내가 여기서 이 친구들에게 져서 취재원을 불면 절대 안 된다.’

심문관의 자리는 내가 앉은 위치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었다. 바닥엔 진짜 핏자국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래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저곳 벌건 자국들이 묻어 있었다. 공포 분위기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심문관이 돌아가며 들어왔는데, 어떤 심문관은 두어 마디를 묻는가 싶더니 곧바로 쇠자를 들어 책상부터 내리치며 “이 새끼 이거 말로는 안 되겠네. 동물적으로 다뤄야 제대로 불겠어!” 하고 엄포를 놓았고, 또 다른 심문관은 들어오자마자 “이거 한 대 피우고 하시죠” 하며 담배를 권하면서 꼬드겼다. 그야말로 어르고 뺨치는 수법이었다. 새벽 한두 시에는 옆방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도 나고 두들겨 패는 소리도 들렸는데 그것은 녹음된 소리 같았다. 지레 겁을 먹고 순순히 털어놓으라는 일종의 심문 수법이었던 듯하다.

나는 꿋꿋하게 버텼다. 초지일관 이미 머릿속에 짜두었던 시나리오를 되풀이했다.

“한반도 상황이 이런 시기에 미국의 안보담당 특보가 서울 들렀다가 북경에 간다면 뻔한 거 아닙니까. 청와대 대책회의를 전해 들은 바는 없지만 아마 내가 대책위원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밖에 결론을 내릴 수 없었을 겁니다. 특종 욕심에 오버해서 작문한 건데 자꾸 누가 그 말을 해주더냐고 물으면 어쩝니까?”

나는 스무 시간 이상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하루가 지나자 심문관들의 초조해하는 빛이 내 눈에도 역력히 보였다. 기자 하나 잡아다 놓고 누구한테 들은 정보인지만 알아내면 되는 걸 하루가 지나도록 자백받지 못했으니 청와대에서 난리를 부렸을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사실을 사실대로 밝힐 수는 없는 일이고…. 머리는 복잡해졌지만 냉철하게 빠져나갈 방도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저들도 빨리 끝내기를 초조하게 원하는 것 같으니 웬만큼 납득할 수 있도록 둘러대면 잘 수습되리라는 확신이 섰다.

우선 조사 과정에서 내게 제일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심문관을 만나고 싶다고 얘기했다. 내 상식에 의하면 이런 요구는 대개의 피의자들이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다는 의미였다. 이내 내가 지목한 심문관이 들어왔다. 나는 담배를 달래서 아무 말도 않은 채 두 대를 연거푸 피웠다. 그리고 체념한 듯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얘기를 하면 이제 나는 밖에 나가서 더 이상 기자 생활 못하는 거 알죠? 그게 제일 힘든데…. 외무부에 자주 드나드는 담당 과장 방이 있는데, 거기 가서 내가 슬쩍 떠봤소. ‘청와대 대책회의에서 브레진스키한테 뭐 부탁하기로 했다며?’ 하고 물었더니 그 과장이 깜짝 놀라 일어나면서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 합디다. 그래서 내가 확신을 가지고 기사를 썼소. 이게 다요.”

말을 마치고는 굉장히 괴로운 표정을 짓는 것은 연극의 마무리였다. 말이 타당성이 있었는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조사를 끝내야 했는지 내 진술은 받아들여졌고 그걸로 끝이 났다. 아마 이와 같은 진술을 처음부터 했더라면 전혀 인정을 받지 못했을 게 뻔하다.

내가 지목한 담당 과장이 사실 확인을 위해 불려 간 것은 자명한 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제 방에 드나드는 맹아무개인 데다 오고간 얘기까지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는 일 아니던가. 불려 와서 몇 마디 대답만 하고는 그것으로 사건은 막을 내렸다. 담당 과장은 훗날 대사까지 지냈으니 불이익을 받은 일도 전혀 없다. 물론 내게 실수로나마 정보를 준 고위 관리도 무난히 차관으로 승진했으니 이 사건의 결론은 해피엔딩이다.

가까이서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손 한 번 잡아 보지 않은 브레진스키 덕분에 남산 경험까지 했으니 이쯤 되면 우리 인연도 보통은 아니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시민일보 시민일보

기자의 인기기사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