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80년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6-11-21 15:5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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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맹형규 의원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1980년 5월17일, 나는 그 소식을 군산에서 들었다. 마침 주말이라서 동서네 식구와 가족 모임을 하기 위해 내려왔던 차였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튀어나와 차를 몰고 서울로 향했다. 워낙 고물차라 마음은 저만큼 앞서 가는데 덜컹거리기만 할뿐 도무지 속도가 오르지 않아서 애꿎은 액셀러레이터만 죽자고 밟았다.

동교동 김대중씨 집에 도착하니 열두 시가 넘었다. 예상대로 집 안은 폭풍이라도 지나간 듯이 풍비박산이 나 있었다. 가족은 아무도 없고 수행원 몇 명과 동아일보의 남찬순 기자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남 기자는 그날 밤 동교동이 박살나는 현장을 지켜본 유일한 인물이었다.

집 안에 들이닥친 군인들은 예의는 고사하고 총부리로 배를 쿡쿡 찔러가며 사람들을 몰아세우고, 김대중씨와 권노갑씨를 끌고 갔다고 들려주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벌벌 떨면서 들었다. 두려움이 아닌 분노가 내 온몸을 흔들어댔다. 당장이야 기사로 쓰지 못하겠지만 언젠가는 꼭 이날의 상황을 기사로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하나 둘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로 꼽힐 1980년 5월은 내게 그렇게 왔다.

이튿날 찾아간 국회는 문을 꽁꽁 닫아서 들어갈 수 없었다. 지금의 KBS 연구동 자리에 있던 의원회관을 갔다가 황낙주 원내총무를 만났다. 후원회 총무인 듯한 분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군인들을 성토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급기야 “야당 의원이 국회도 못 들어갑니까? 원내총무 정도는 국회에 들어가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하고 황 의원의 등을 떠밀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이 황 의원과 국회로 향했는데 예상대로 정문에서 군인들에게 제지를 당했다. 황 의원이 “이놈들아!” 하고 호통을 치자 그들은 시위라도 하듯 총으로 가로막았다. 더 이상 꼼짝할 수가 없었다. ‘뭐 이런 녀석들이 있나’ 하는 생각에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지만 거기서 맞서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총을 가진 군인에게 누가 덤빌 것인가.

몸을 돌이키려는 순간, 내 눈에 포신이 정문을 향해 놓인 대포가 들어왔다. 의사당 지붕 위였다. 저게 어떻게 저 위에 올라가 있을까라고만 생각했지 사진을 찍어 둘 생각을 못한 것이 아직껏 후회가 된다. 1980년 5월의 사진을 숱하게 보았지만 의사당의 대포를 찍은 것은 한 장도 발견하지 못해 아쉽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것은 분명 대포였다.

짧은 기간이어서 정확한 판단이 아닐 수 있지만 내가 받은 인상은 우선 듣기보다 말하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다. 가령 한 시간짜리 모임이라면 전 대통령이 말을 하는 시간은 조금 과장해서 59분, 나머지 1분이 두세 사람이 말할 기회를 갖는데 그 내용은 이구동성으로 “지당하십니다”류의 아부성 발언이 전부다.

또 다른 인상 하나는 대단한 자기과시형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전 대통령은 어떤 자리에서든 자랑을 많이 하는 편이다. “엊그제 경제 전문가들을 만났는데 나보고 자기들보다 낫다고 하더라”는 식이다.

군사정권에 대단히 비판적인 기자가 청와대 출입 기자로 자리를 옮긴 뒤 갑자기 전 대통령 사람이 된 것처럼 태도가 바뀌었다. 대통령이 오란다고 해서 가보니 배석자도 없는 독대 자리였단다. 거기서 대통령이 백년지기 만난 듯 반갑게 맞더니 기자 무릎에 손을 얹고 “동지, 날 좀 도와주소” 하더란다. 국가원수가 인간적인 친밀감을 보이는데 그만 반해 버렸다나….

아무튼 전 대통령과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은 지금도 그를 나쁘게 얘기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대단한 친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다.

‘권력을 잡으면 착각에 빠진다.’

그 착각이 이 땅에 80년 5월의 비극을 만든 건 아니었을까?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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