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동 김대중씨 집에 도착하니 열두 시가 넘었다. 예상대로 집 안은 폭풍이라도 지나간 듯이 풍비박산이 나 있었다. 가족은 아무도 없고 수행원 몇 명과 동아일보의 남찬순 기자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남 기자는 그날 밤 동교동이 박살나는 현장을 지켜본 유일한 인물이었다.
집 안에 들이닥친 군인들은 예의는 고사하고 총부리로 배를 쿡쿡 찔러가며 사람들을 몰아세우고, 김대중씨와 권노갑씨를 끌고 갔다고 들려주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벌벌 떨면서 들었다. 두려움이 아닌 분노가 내 온몸을 흔들어댔다. 당장이야 기사로 쓰지 못하겠지만 언젠가는 꼭 이날의 상황을 기사로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하나 둘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로 꼽힐 1980년 5월은 내게 그렇게 왔다.
이튿날 찾아간 국회는 문을 꽁꽁 닫아서 들어갈 수 없었다. 지금의 KBS 연구동 자리에 있던 의원회관을 갔다가 황낙주 원내총무를 만났다. 후원회 총무인 듯한 분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군인들을 성토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급기야 “야당 의원이 국회도 못 들어갑니까? 원내총무 정도는 국회에 들어가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하고 황 의원의 등을 떠밀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이 황 의원과 국회로 향했는데 예상대로 정문에서 군인들에게 제지를 당했다. 황 의원이 “이놈들아!” 하고 호통을 치자 그들은 시위라도 하듯 총으로 가로막았다. 더 이상 꼼짝할 수가 없었다. ‘뭐 이런 녀석들이 있나’ 하는 생각에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지만 거기서 맞서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총을 가진 군인에게 누가 덤빌 것인가.
몸을 돌이키려는 순간, 내 눈에 포신이 정문을 향해 놓인 대포가 들어왔다. 의사당 지붕 위였다. 저게 어떻게 저 위에 올라가 있을까라고만 생각했지 사진을 찍어 둘 생각을 못한 것이 아직껏 후회가 된다. 1980년 5월의 사진을 숱하게 보았지만 의사당의 대포를 찍은 것은 한 장도 발견하지 못해 아쉽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것은 분명 대포였다.
짧은 기간이어서 정확한 판단이 아닐 수 있지만 내가 받은 인상은 우선 듣기보다 말하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다. 가령 한 시간짜리 모임이라면 전 대통령이 말을 하는 시간은 조금 과장해서 59분, 나머지 1분이 두세 사람이 말할 기회를 갖는데 그 내용은 이구동성으로 “지당하십니다”류의 아부성 발언이 전부다.
또 다른 인상 하나는 대단한 자기과시형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전 대통령은 어떤 자리에서든 자랑을 많이 하는 편이다. “엊그제 경제 전문가들을 만났는데 나보고 자기들보다 낫다고 하더라”는 식이다.
군사정권에 대단히 비판적인 기자가 청와대 출입 기자로 자리를 옮긴 뒤 갑자기 전 대통령 사람이 된 것처럼 태도가 바뀌었다. 대통령이 오란다고 해서 가보니 배석자도 없는 독대 자리였단다. 거기서 대통령이 백년지기 만난 듯 반갑게 맞더니 기자 무릎에 손을 얹고 “동지, 날 좀 도와주소” 하더란다. 국가원수가 인간적인 친밀감을 보이는데 그만 반해 버렸다나….
아무튼 전 대통령과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은 지금도 그를 나쁘게 얘기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대단한 친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다.
‘권력을 잡으면 착각에 빠진다.’
그 착각이 이 땅에 80년 5월의 비극을 만든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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