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총수와 가스라이트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6-11-22 16:2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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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맹형규 의원 1986년 4월, 런던 히드로 공항에대형 비행기 두 대가 내렸다. 전두환 대통령의 영국 방문을 위해 서울에서부터 날아온 비행기다. 문이 열리고 대통령이 내려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고 공항을 떠난 뒤, 비로소 두 대의 비행기 안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통령의 영국 방문에 동승한 기자단과 내로라 하는 재벌 총수가 포함된 기업인들이었다.

잠시 후, 입국 심사장에는 커다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그 곁에 쪼그리고 앉은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보인다. 조금 전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이다. 쪼그리고 앉아서 입국 심사를 기다리는 것이야 그렇다 친다지만, 세관 검사도 그 자리에서 진행된다. 국내에서는 손에 흙 한번 안 묻힐 귀한 분들이 바닥에 가방을 펼치고 검사를 받는다. 아무리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라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빈 방문이라는 이름을 내건 이런 대규모 방문단도 민망하고 부끄럽기는 마찬가지다.

아마 전세계에서 대통령의 외국 방문에 대형 비행기 두 대만큼 사람을 태우고 다니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을 것이고, 국빈방문이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신문 제목으로 뽑는 나라도 우리뿐일 것이다. 내가 본 바로는 영국을 방문하는 외국의 정상들은 대개 실무에 꼭 필요한 사람 몇 명만 데리고 입국했다가 볼일을 마치면 곧바로 떠나는 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국빈 방문이라는 말도, 쓸 이유도 전혀 없다.

사실 대통령의 해외 순방이나 정상회담 등을 보도하는 우리 신문의 태도는 요란하거나 과장된 감이 없지 않다. 연일 방문 성과뿐 아니라 그날그날의 일정을 여러 면에 걸쳐 싣는가 하면, 대통령이 식사는 무엇을 했는지, 몇 시에 일어났는지, 심지어 발을 꼬고 앉았는지 비스듬히 앉았는지, 양복은 무슨 색을 입었는지 등 시시콜콜한 것까지 가십이라 해서 따로 묶어 싣는 과잉 친절을 베푼다.

바로 이런 과잉 친절 중 하나가 현지 반응이라는 기사다. 전 대통령의 영국 방문을 취재하는 동안 가장 곤혹스러웠던 주문이요 취재였다. 대통령의 방문 사실조차 모르는 시민들에게 인터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임의로 작문을 해서 보낼 수도 없으니 그야말로 난감하기 짝이 없다.

생각하다 못해 찾아간 곳이 참전용사회. 한국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노병들은 대부분 우리나라에 대해 호의적이고 관심도 많았다. 대통령의 영국 방문 소식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아서 인터뷰를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거품은 경제에만 있는 게 아니라 외교에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전 대통령의 영국 방문을 통해 보았고 확인했다. 우리도 다른 나라의 정상들처럼 거품을 걷은 채 실무적인 인원만으로 단출한 나들이를 하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대통령이 영국을 방문하던 때의 어느 날 저녁. 런던의 술집 ‘가스라이트’에는 한 무리의 한국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건너편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영국인 남자 한 명이 자꾸만 한국인들의 무리를 힐끗거렸다. 그리고 옆 좌석 사내에게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고 속삭였다. 이내 둘은 그곳을 조용히, 그러나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다음날 아침 신문에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이 지난밤 런던 시내의 술집인 가스라이트에서 여자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확인 결과 기사의 주인공은 전 대통령이 아니라 국내 굴지의 기업 총수였다. 작은 키에 벗겨진 이마 때문에 멀리서 보면 전두환 대통령과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전 대통령이 영국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알고 있는 영국 기자가 가스라이트에서 만난 이 재벌 총수를 대통령으로 오인해서 저지른 오보였다. 기업 총수는 이날 자신이 소유한 회사의 현지 직원들과 회식을 하던 중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내용을 보고받은 대통령의 경호실장이 문제의 기업 총수를 불러 혼쭐을 냈다는 뒷이야기는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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