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은 경복궁 정문으로 홍예양식(虹霓樣式)에 고설삼문(高設三門)으로 지어졌고… 우진각 지붕에 중층 건물로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마루에는 취두용두(鷲頭龍頭) 잡상(雜像)을 설치했다.’
여기서 취두(鷲頭)란 용마루 양쪽의 기와를 말하고 용두(龍頭)란 추녀마루 끝의 기와를 말한다.
‘문 높이는 17척 5촌, 너비 18척, 좌(左)·우(右) 협문(夾門)은 높이 16척, 너비 14척 5촌, 문주(門柱)는 앞면 3칸, 측면 2칸이다… 1396년 태조 5년에 세워졌고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865년(고종 2년) 경복궁을 중건 할 때 복원하였다… 1927년 건춘문(建春門) 북쪽으로 옮겨졌는데 6·25 동란 때 폭격되어 망가졌다.’
현재 광화문은 1968년 박정희 대통령 때 지금 위치로 복원하였는데 철근 콘크리트로 중건했다.
광화문 답사객들은 도무지 홍예문(虹霓門)이 뭐고 고설삼문(高設三門)이 뭔지를 모르는 천객(賤客)들이다. 그렇다면 홍예문(虹霓門)이란 무엇이더냐!
“광화문 통로의 상부 천정면(天井面)을 봐요… 마치 무지개처럼 반원(半圓)을 그리고 있잖아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한자로 무지개를 뜻하는 홍예(虹霓)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결국 아치형 문을 말하지요.”
종종 권위 있는 명문대학 교수들이 아치문이라고 강론하면 그걸 수강하는 현대판 우중(愚衆)들은 아주 장중하고 당당한 개선문(凱旋門)이라고 후한 점수를 매기지만 그걸 홍예문이라 물으면 태반의 천객들은 그게 무슨 양식이냐고 되물을 터이니 참으로 걱정된다.
그렇다면 고설삼문(高設三門)은 무엇이더냐?
“광화문의 입·출구를 잘 살펴봐요… 중앙 정문은 넓고 높은지라 고설이고 좌·우문 2개문은 좁고 낮은지라 동서협문(東西夾門)이라 부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건축양식을 고설삼문이라 하지요.”
마지막으로 지붕 처마는 겹처마 양식이라 했는데 그건 또한 무어냐고 의심할 거다.
“궁궐 건물의 처마를 잘 관찰 해봐요… 처마를 만들 때 둥글고 긴 서까래에 짧고 네모진 서까래를 덧붙여 두 겹으로 만들었지요…’ ‘그걸 부연(婦椽)을 댔다고 말하지요… 처마 서까래가 하나일 때 그걸 홑처마라고 하고 두 겹일 때 겹처마라고 말하지요… 홑처마보다 채광(採光) 효과가 좋고 무엇보다 건축미(建築美)가 돋보이죠!”
‘겹처마의 짧은 서까래를 부연(婦椽)이라 칭하는데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인연설화(因緣說話)는 역설의 미학으로 흔히 현자(賢者)들이 강론할 때 그 말감으로 동원하기를 즐긴다. 동행한 영감의 강론은 단편의 야화였다.
“겹처마를 부연(婦椽)이라 하여 며느리서까래라고 말하지요.”
“그러니까 옛날 대목수를 시아버지로 모시는 며느리가 있었어요… 그 시아버지는 세상의 명장(名匠)으로 소문이 났는데… 때마침 나라에서 궁궐을 지을 때 불려갔지요.”
“그런데 그 대목수가 아들에게 서까래 감을 잘 골라 그걸 알맞게 자르라고 했더니 그 아들이 실수하여 너무 짧게 자르는 통에 그걸 쓸 수 없게 됐어요… 잘못하면 파직(罷職)당하고 그걸 물어내야 할 판이었죠”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부자목수(父子木手)가 그렇게 낭패를 당해 쩔쩔매고 있을 때 그 집 며느리가 궁리 끝에 그 해결할 방도(方途)를 일러 줬어요… 바로 긴 서까래 위로 짧은 서까래를 덧붙여 처마를 꾸미면 훨씬 좋을 거라고요… 시아버지는 고민 끝에 그런 방법으로 겹처마를 꾸몄더니 왕은 궁궐이 한결 아름다워졌다며 되레 큰 상을 내렸어요… 그래서 서까래 연(椽)자에 며느리 부(婦) 또는 덧붙일 부(附)를 붙였다고 하는 거죠.”
그 노객의 설명은 그냥 그 작명야화(作名野話)로 흘려버리기는 너무나 값진 역설(逆說)의 지혜이다. 아들 목수의 실수(失手)에 아비 목수의 감독 부실로 그런 큰일을 당했지만 며느리의 지혜(智慧)로 더 아름다운 처마를 만들어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데나 전화위복이라는 값비싼 말을 함부로 쓰고 있는데 이런 경우에나 써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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