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더니 정북(正北) 쪽으로는 흥례문(興禮門)이 멀리 보이고 가까이에는 소위 금천(禁川)이 가로 방향으로 조영돼 있고 그 위로는 영제교(永濟橋)가 있었다. 나는 그 동안 궁궐관련 자료를 접할 때마다 ‘금천’이니 ‘영제교’니 하는 말을 수 없이 들어봤으나 막상 그걸 보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았다.
‘금천(禁川)은 누가 언제 왜 만들었을까?… 영제교(永濟橋)의 석수(石獸)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 영감은 나의 얼굴 표정을 어느 새 읽었는지 대뜸 그걸 강의해 갔다.
“금천의 조영 시기는 정확히 잘 알 수 없어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411년(태종 11년)에 “성서(城西)쪽에 모퉁이를 파서 명당수(明堂水)를 금천(禁川)으로 끌어들이도록 명하였다”고 전하지요… 또한 1431년(세종 13년)에는 “광화문 영제교의 뜰 등에 부녀자의 출입을 못하도록 하라”라는 기록도 있어요… 그런 사실로 미뤄보면 경복궁 조영 당시 그러니까 1395년(태조 4년)부터 있었던 것 같아요.”
오늘 경복궁 기행에서는 그동안 백방으로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서너 개 학설을 정리할 터이다.
첫째 가설(假說)은 명당기혈(明堂氣穴)을 집결시키려는 풍수적 비보책(裨補策)이라는 주장이다.
“원래 풍수지리상 그 기혈(氣穴)의 통로는 지맥(地脈)이지요… 물길을 만나면 기혈은 더 이상 흘러가지 못하고 그 곳에 혈점(穴占)이 생기지요… 백두산 정기가 태백산 줄기를 타고 한북정맥을 끼고 금강산 쪽으로 흘러서 되돌아 나와… 백암산 향로봉, 복주산, 백운산, 북한산을 거쳐 북악산까지 오지요… 그러니까 경복궁에 금천(禁川)을 만들어 그 곳에 혈점을 맺히게 하는데 그것을 비보책으로 보면 되지요.”
둘째 학설은 궁궐 방위를 위한 무속적 방술(方術)이라는 주장이다.
“금천과 영제교 난간에는 네 마리의 천록(天鹿)이 있어요… 그 석상의 눈초리가 매섭지요… 궁궐에 사특한 간신(奸臣)이나 역신(逆臣)이 들어오지 말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광화문의 해치가 일차로 그 자들을 막지 못했더라도… 여기 영제교 천록이 다시 한번 검열(檢閱)한다는 뜻이지요.”
여하튼 어느 사찰(寺刹)의 건물 배치가 조영원칙에 충실하였다면 반드시 초입부에는 일주문(一柱門)이 있고 그 다음 천왕문(天王門)을 만나게 된다. 거기에는 불법세계의 수호를 위하여 사방(四方)으로 네 분의 천왕들이 창과 칼, 비파, 용과 여의주 그리고 보탑(寶塔)으로 무장하고 초계를 서고 있을 거다. 바로 영제교 천록(天鹿)도 그러한 원리와 비슷하다는 거다.
따라서 아무리 권세(權勢)가 높으신 자라도 사악한 마음을 가지고서는 절대 경복궁 군왕을 면대(面對)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세 번째 주장은 세심천설(洗心川說)이 그것인데 그것 역시 유력한 학설이다.
“금천(禁川)은 때로 금천(錦川)이라고도 하지요… 그 금천에는 항상 북악산 기슭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흘러요… 만조백관들은 그 영제교를 통해 입궁을 하지요… 속인(俗人)들은 몸은 자주 씻을 줄 알지만 마음을 씻는 일은 게을리 하지요… 그러니까 마음이 더러워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죠.”
우리는 명산(名山)의 대소 사찰에 가기위해 입산(入山)할 때 종종 그 길목에서 세심천(洗心川)이니 무심천(無心川)이니 하는 명소와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속인잡중(俗人雜衆)들이 성역의 사찰에 들어갈 땐 미처 씻어내지 못한 욕심을 씻고 들어가라는 뜻이다.
경복궁 영제교(永濟橋)가 그렇고 창경궁 옥천교(玉川橋) 창덕궁과 경운궁(덕수궁) 그리고 경희궁의 금천교(禁川橋)가 그러하다.
이상 세 종류의 금천야화(禁川夜話) 중 어느 것이 정설(正說)인가를 단정 지을만한 단서는 없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옛 풍습에는 궁궐·관아·절집 심지어 마을 입구에는 여러 종류의 수호물(守護物)들이 있는데 나름대로 그 존재이유를 선(善)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도 현대판 문명인들은 고등 신앙의 우산 속에 씌어서 그런지 우상의 잔재쯤으로 천시하고 있는데 그건 아주 경박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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