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정치인들은 점잖게 민주주의를 말했지만 국민들은 굶주림으로 길거리를 헤매야 했다. 지상의 모든 지식과 쾌락을 얻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처럼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잘 곳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팔 기세였다.
그때 등장한 박 대통령은 국민에게 미래를 위한 메시지를 던졌다.
“우리도 하면 할 수 있다.”
국민들은 희망을 보았다. 비전을 가졌다.
“우리도 노력하면 잘살 수 있다.”
그 시절엔 토요일도 없었고 일요일도 없었다. 새마을 노래의 가사처럼 도시에서는 새벽종이 울리고 새 아침이 밝으면 너도 나도 일어나서 일터로 나갔고, 시골에서는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며 새마을을 가꿨다.
무역회사 직원들은 외국의 바이어들에게 하나라도 더 팔려고 눈물나게 노력을 했고, 공장의 생산직 근로자들은 노랫소리 크게 틀어놓고 잠을 쫓아 가며 밤낮없이 일했다.
몸이 부서지도록 만나고 설명하고 생산하면서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하면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앙청 출입 기자를 하면서 만난 김종필 총리는 기자들 앞에서 큰소리를 쳤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대학생들이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시대가 올 겁니다.”
아직도 마음놓고 하루 세 끼를 해결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던 시절이어서 뒤돌아서서 코웃음을 쳤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희망은 상상만으로도 사람을 들뜨게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시대가 왔다.
1990년대 초반이었을 게다. 워싱턴에서 교수를 하는 동서가 와서 앞으로는 전화기를 주머니에 꽂고 다닌다는 말을 했을 때에도 웃어넘겼다. 그런데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시대가 왔다. 더욱이 그 부분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나라가 우리라는 사실은 어깨를 으쓱이게 한다.
무겁고 무기력하고 각박한 이미지로 인식되던 서울이 새롭게 거듭나고 있다.
대중교통 위주로 소통시킨 도로 정책은 시원하게 뚫린 서울을 만들었고, 시청 앞의 잔디밭은 도심 한복판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잡아 일상에 지친 시민들을 여유롭게 한다. 숲으로 가꾸어 새롭게 변화시킨 뚝섬은 서울의 오아시스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청계천 복원은 또 어떤가. 청계천 복원은 토목공사를 통해 이루어졌지만 단순한 토목공사 이상의 의미가 있다. 무거운 서울을 가볍게 하는 공사요, 무기력한 서울을 활기차게 하는 공사며, 각박한 서울을 여유 있게 하는 공사였다. 서울의 미래에 대해 자신감과 기대감을 갖게 한 의미 넘치는 공사였다.
사람들은 말한다. “서울도 숨쉴 만한 도시구나”라고. “서울도 가꾸면 얼마든지 사람 살 만한 도시가 될 수 있구나”라고. 멀쩡한 교통 체계를 정비한다고 불평도 많았고, 생업에 지장을 받은 청계천 주변 상인들의 불평도 많았지만 지금은 누구도 불평하거나 불만을 품지 않는다. 왜? 단언하건대 서울이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서울에 아름다움을 입힐 일만 남았다. 세계적인 도시에 걸맞은 특징 있는 아름다움을 만들어야 하고 사람 사는 냄새 폴폴 나는 아늑한 아름다움을 만들어야 한다. 숨쉴 만한 도시를 만드는 데 성공했으니 그 위에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은 한결 쉬울 터이다.
희망이 만드는 미래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역시 희망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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