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별청(奇別廳)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6-12-13 18:3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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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근(노원구청장) 이에 훈구세력들이 크게 분노하며 사림파에게 그 기록을 빼달라고 요구를 하였지만 그걸 거절당하면서 양 진영간 한판대결이 벌어진 거다.

훈구파의 반격은 이러했다.

‘김일손이 쓴 사초(史草)에는 조의제문(弔義帝文)에 관한 것을 인용했는데 그건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권을 빼앗은 것을 비유한 것이다… 세조가 사육신 중 박팽년을 회유하려 했다… 세조가 총애하는 승려 학조(學祖)를 비난했다… 등등’

연산군은 훈구파의 그러한 폭로를 접하고서 어떻게 대응했을까?

“몹시 화가 치민 연산군이 그냥 있겠어요? 사림파 출신 사관 김일손 등 여러 명을 잡아들여 대역 죄인으로 능지처사(陵遲處死)를 하고요…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이미 죽은 그의 스승 김종직등의 묘까지 파헤쳐서 그 형벌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였어요… 그 사건이 바로 무오사화이지요.”

여하튼 연산군의 성정도 대단하다. 도대체 어느 세상의 역대 제왕이 이미 죽어 매장한 시신까지 꺼내 참형(斬刑)을 가하던가!

그래서 훗날 퇴계 이황선생은 화기환(和氣丸)이라는 심리처방을 내렸는가!

“대화(大禍)가 치밀 때는 참을 인(忍)자의 획을 하나씩 떼어 천천히 씹어 먹어라… 그러면 그동안 그 화가 가라앉을 테니까….”

여하튼 궐내각사를 들러 답사목록에도 없는 조선왕조의 간쟁과 사관제도까지 학습을 하였으니 그게 바로 배우는 자의 기쁨일 게다.

이제 우리 일행은 답사행로를 바꿀 때가 됐다.

여하튼 나는 동행한 노객과의 몇 가지 문답(問答)을 통해 그런 종류의 정보를 구했다.

“영감님! 저기 저 기별청(奇別廳)이란 무엇을 하는 곳이지요?”

내가 그렇게 물었더니 그 노교수는 말문을 열었다.

“지금은 신문이 있어 소식을 전하지만 옛날에는 기별청에서 조보(朝報)를 발행했어요. 여기에는 조정의 결재사항과 인사나 백성들의 상소나 천재지변 등등… 그러니까 오늘날 ‘국정홍보처’ 같은 거지요.”

“그렇다면 영감님! 우리가 어릴 때 ‘사발통문(沙鉢通文)’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것은 또 뭔가요?”

“조보(朝報)는 조정의 기관지 같은 것이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통문(通文)이라는 소식지가 성행했어요… 서두에 통문(通文)이라 쓰고 다음 줄은 ‘우여위통유사은(右女爲通諭事殷)’으로 시작하여 모임장소, 일시 등을 기재하고 천만행심(千萬幸甚) 이라는 글귀로 끝맺지요… 주로 서원·향교 등 유림에서 많이 쓰고 발신 연월일·발신처·발신자 등도 기재하였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렸을 때 걸핏하면 사발통문(沙鉢通文)을 돌렸느니 하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런 의미란 말인가요?”

“조선말기에는 국정이 혼란한 지라 민란(民亂)이 자주 일어났어요… 그때 그 주모자(主謀者)를 숨기기 위해 통문(通文)을 쓰고 그 아래에 사발(沙鉢) 모양으로 둥글게 연명(連名)을 하였어요… 동학군도 그런 통문으로 의병들을 모집했어요.”

그러나 그런 종류의 사발통문은 이제 역사 속으로 그 자취를 감추었다.

1950~1980년대 학생운동이나 노동현장에서 한때 성행하던 대자보(大字報)도 따지고 보면 그 형식을 모방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발통문은 전자통신의 발달로 형편없이 그 위세(威勢)가 떨어졌다.

답사시간을 어느 정도 기별청을 학습하는데 할애(割愛)했으니 이제는 답사행로를 바꿀 때가 됐다. 벌써 시간은 정오(正午)에 가까이 와 있다. 여느 답사 길은 3시간 정도 지나면 피곤과 싫증이 겹칠텐데 오늘 답사는 그러하질 않다.

아마 그 이유는 그 노교수와의 동행인연(同行人緣)이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일 거다. 이 천학(淺學)이 고적답사를 몇 년 동안 광인(狂人)처럼 쏘다녀 봤지만 이번처럼 명강사(名講師)를 만나기는 처음이다.

정말 우학(愚學)이 현학(衒學)을 만난 거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이 천학(淺學)이 근정문에 가까이 다가섰더니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는 게 아닌가! 아마도 이 천학이 두려운 것은 근정전이 600년(태조 1392~순종 1910년:518년) 조선정치사를 고스란히 목격해 온 증인(證人)이기 때문일 거다. 아마 근정전 앞마당엘 와서 이 우학(愚學)이 자칫 허튼소리 하다가는 근정전 영혼들이 크게 화를 낼 터이니 두렵지 않을 수 없는 거다.

“이 천학(淺學)의 재주로 과연 근정전의 역사를 어떻게 감당할지….”

우선 근정문(勤政門)의 명세서부터 학습할 터이다.

‘1395년(태종 4년) 경복궁이 창건될 당시 지어졌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1867년(고종 4년)에 중건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 중층(重層)의 우진각 지붕으로 다포식 건물이다… 행각은 창건 당시는 단랑(單廊)이었는데 중건하며 복랑(複廊)으로 바꿨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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