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정치사회학자인 모리스 뒤베르제(Maurice Duverger)의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나에게 정치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었고, 정치에 대한 생각을 바로잡게 해주었다. 이 책은 정치가 갖고 있는 야누스의 두 얼굴, 즉 한편으로는 갈등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통합하는, 즉 갈등과 통합의 양면성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성격은 지금의 우리 정치에서도 그대로 통용되는 논리라고 생각한다.
사무엘 헌팅톤의 ‘정치발전론’을 통해서는 비로소 근대화의 의미를 되짚어볼 수 있었고, 한 사회의 근대화 발전은 바로 정치적 근대화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절감했다. 한 사회가 성공적으로 근대화를 이룩할 수 없다면 결국 후진국가로 전락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근대화의 전개 과정에는 수많은 혼돈과 갈등이 수반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위로부터 강압적인 동원’이 아닌 시장 중심의 자발적인 근대화가 성공을 가져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스탈린주의가 노동자 농민을 위한다고 주장하지만 결국은 노맨클라트라, 즉 새로운 특권적 권력층을 만들어서 그들만의 지배체제로 고착된다는 것, 그들만의 천국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국민 대다수는 근대화와는 무관한 고통의 삶을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로소 나는 광주의 충격적인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이들의 책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마르크시즘에 상당부분 기울고 있었는데, 그러한 내 생각은 일상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분노감의 한 표시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분풀이의 모습일 수는 있지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문제의 해결은 오랜 역사의 경험에서 얻어진 시장 중심적인 국민의 자유로운 선택만이 성공적인 근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함으로써 비로소 나는 마르크스주의와 상당부분 거리를 둘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국가의 한계를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대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시장이라고 믿었지만, 이번에는 바로 그 시장이 문제였다. 그 시장은 결코 ‘보이지 않는 손’일 수는 없다. 시장은 기대만큼 순수하지도 자율적이지도 않으며, 중립적이고 합리적인 조정자도 아니다. 관료들 사이에 펼쳐지는 유착관계는 시장의 정상적인 기능을 극도로 위협하고 있다. 그 결과 소수 재벌급 기업인들이 나타났다. 이들에 비해서 노동자와 농민의 빈곤은 좀처럼 해결될 수 없는, 점점 더 궁핍의 상태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나는 단순히 시장의 기능만을 강조하기에 앞서 먼저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시장을 만들지 않는다면 결국 시장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고통 받을 수 있고 그 고통 위에 재벌과 같은 거대 기업체만이 성장하게 된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되었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시장주의자이지만 모든 것을 지금의 그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강조하는 시장 지상주의자는 될 수 없었다. 시장이 시장다운, 즉 합리적인 수요 관계의 장을 마련해 주는 본질적인 시장일 때만이 시장의 본래 기능이 살아난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본원적 시장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시장이 말하게 하라!”고 주장하기에 앞서 먼저 “시장을 시장답게 만들자! 시장이 제대로 기능할 때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하자!”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단순한 시장주의자나 고전적 자본주의자와는 구분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유주의자(Liberalist)’의 모습으로 내 자리를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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