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시장자본주의는 오늘의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극단적으로 개인을 자기 소외에 빠지게 했다. 그렇다고 이를 이전처럼 집단주의적인 결속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국가주의적인 발상일 뿐이다. 이 점에서 가정이나 지역공동체와 같은 개인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 간의 연대에 의한 공동체를 이룩하게 해야 한다. 이들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자율권도 보장해 주면서 사람들 사이에 협력적인 연대를 이룩하게 하고 사회의 통합을 확립하는 것이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시장주의를 근간으로 삼으며, 소외된 개인을 가정이나 지역사회 또는 특정 공동체가 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공동체적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 곧 ‘인간의 얼굴을 한 자유주의’의 핵심이다. 이렇게 되면 개인의 자유와 자율이 전제되는 합리적인 시장의 기능도 가능해지며, 나아가 사람들 사이에도 협력적인 인간관계를 성립시킬 수 있다.
자유주의는 집단보다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를 강조한다. 중세의 집단주의적인 관념이 사람들을 국가와 종교의 이름으로 구속했을 때 그것에서 벗어나게 했던 인간해방 사상이 자유주의였다. 오늘날 우리는 자유주의를 보수주의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진보적이며 개혁을 특징으로 삼아왔다. 이 점에서 사회주의는 급진적 자유주의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각 개인의 자기실현이 가능한 정치사회의 구현이 곧 자유주의의 지향이다. 따라서 나는 자유주의야말로 정치는 참여를 전제로 하는 참여민주주의로, 경제는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는 시장주의로, 사회는 다원성을 근본으로 하는 공존주의로 나아가게 된다고 믿는다.
물론 자유주의는 20세기를 넘어서면서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와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로 양분되었는데, 고전적 자유주의는 개인의 이익실현과 충족성에 근거해서 각 개인은 삶의 주체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능력과 노력에 따른 정당한 배분을 요구했다. 그 결과 자유방임의 사회로 나아가게 되었고, 여기에서 빚어졌던 사회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회주의의 급진적 집단주의가 등장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결국 ‘복지’에 따른 국가관여의 증대로 ‘가장 값비싼 정부’만을 안겨주었으며, 이것에 맞서 고전적 자유주의로의 회복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20세기 후반의 신자유주의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또다시 시장의 절대성만을 강조하는 특징을 보여줌으로써 평등과 복지의 문제를 경시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인간의 얼굴을 한 자유주의’, 즉 ‘제3의 자유주의’를 주장하려 한다. 그것은 개인의 자율과 창의를 중심으로 자기실현의 사회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만, 이것 때문에 극심한 사회경쟁이 빚어낸 ‘갖지 못한 사람들’을 내버려두는 비인간적인 사회구조가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가 주장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유주의’, 즉 ‘제3의 자유주의’는 시장지상주의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도 아니고, 오히려 1930년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과도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국가가 국가답게 올바로 기능함으로써 모두가 함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자유주의라고 말하고 싶다.
비록 정치관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해도 내 삶의 정치 지향은 곧 ‘인간의 얼굴을 한 자유주의’ 즉 ‘제3의 자유주의’로, 이것에 의해 내 나름의 정치 지형을 만들어나가려 한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