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 현대판 정객들이 무슨 혁신이니 개혁정치의 구령(口令)을 외치고 있으니 구태여 조광조에 대한 인물탐구를 비켜갈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 천학은 조광조 선생의 개혁정치를 강론할 만한 건강한 역사정보(歷史情報)가 없다.
그러하니 이 천학(淺學)이 고군분투하며 그에 관한 강좌를 하더라도 그건 부실할 터이다. 차라리 그 강론은 조광조(1482~1519년) 이력서로 대체할 터이다.
‘그는 조선 중기 정치가·문인·성리학자로서 호는 정암이고 본관(本貫)은 한양이다. 그의 가문(家門)은 조선창업 공신 온(溫)의 5대후손이고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낸 원강(元鋼)이다. 중종 5년 1510년 29세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 시험)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1515년 성균관의 천거로 벼슬길에 올라 전적(典籍:성균관의 정6품직), 감찰(監察:사헌부의 정6품직), 공조좌랑, 홍문관 부수찬,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남곤, 홍경주 등 훈구파로부터 반발을 사서 1519년 기묘사화 때 전라도 능주(綾州)로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선조 때 와서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조광조의 개혁코드(改革cord)는 결코 그 가문과 학풍 그리고 벼슬경로가 아닐거다. 과연 그분의 개혁정치가 무엇이냐 일거다. 강론방식은 동행한 노객과의 질의응답이다.
“영감님! 그분은 당시 왜 정치를 개혁하려 했나요?”
“훈구대신들은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그걸 막아내지 못했지요. 그것이 조광조 등 사림파(士林派)에게 무엇인가 정치를 개혁할 명분을 준 거지요.”
채홍사(採紅使)가 미녀를 징발하고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들었고… 심지어 경연(經筵)과 사간원을 폐지하고 원각사를 기생(妓生) 양성소로 꾸미는 등등…. 폭정의 사례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다.
“결국 성희안과 박원종 등 두 의인(義人)이 주동하여 연산군을 축출한 거지요. 그리고 진성대군(성종의 둘째 아들이며 연산군의 이복동생)을 중종으로 옹립(1506년 9월)하였지요.”
역사는 그것을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 훈구정객들의 행태는 정말 꼴불견이었어요… 그들은 반성은커녕 재빨리 반정(反正)의 공신노릇을 하려 했지요.”
사실 두 사람은 연산군 폭정(暴政)의 피해자들로 결코 훈구파의 정통세력이 아니다.
‘성희안(1461~1513년)은 이조참판(吏曹參判:종2품) 출신으로 연산군의 학정(虐政)을 비판하다가 미관말직(微官末職:종9품)으로 강등을 당했고… 박원종(1407~1510년)은 경기도 관찰사 출신으로 그의 누님(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처)이 연산군에게 겁탈을 당한 후 자살하였으니….’
그와 같은 연산군 학정(虐政)에 앙심을 품고 있는 터에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그를 축출하는데 앞장 선 거다.
“그런데도 훈구대신들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을 독차지 하려했지요… 이때 중종은 그 훈구파들을 견제할 인물이 필요했는데… 때마침 개혁파 조광조가 유교이념에 충실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창 했었지요… 그것이 조광조를 발탁한 주 이유(理由)이지요.”
그렇다면 조광조 등 사림파(士林派)의 정치개혁 목록은 무엇이었나?
“첫째로 인적청산으로 조정의 요직을 사림파 출신으로 바꿨어요… 훈구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가짜 공신(功臣)들을 몰아내려 한 거죠.”
사실 그 당시 조광조 등 개혁세력은 중종반정의 정국공신 126명 중 무려 75명의 위훈(僞勳)을 삭제하고 훈구파들을 한직(閑職)으로 축출하고 그 자리에 사림파를 등용하였다.
“둘째는 정치제도(政治制度)를 개혁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어요… 미신타파를 위해 소격서(昭格署)를 폐하고 전국에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열어 상부상조를 도모하고….”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